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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r 13. 2020

데생 1

임계점



언어는 계단식 성장을 한다고 한다. 임계점에 다다르기까지는 변화가 미미하지만 임계점에 다다르면 실력이 한 단계 향상되는 것이다. 아니 이 무슨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와 같은 대답이냐 싶지만 실제로 나도 겪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영어 교육이 의무화가 되었다. 문법 위주의 영어에서 벗어나 회화 위주로 수업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업방식이었다. 수업 방식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선생님의 ‘how’s the weather today?‘라는 질문에 내가 어버버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강남 학군이라 선행학습이 잘 된 것이었는지, 그게 당연한 건지 적잖은 충격에 그 날 당장 엄마한테 가서 영어학원을 보내달라 했다.


영어 학원만 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영어 실력이 는 것은 나 혼자 공부를 했을 때였다. 주어, 술어, 형용사, 부사도 구분 못해서 한 단어, 한 단어 찾아가며 읽다 보니 어느 순간 글이 읽혔다. 그건 사람들이 말하는 '트였다'와 같이 머리가 번쩍이는 순간이었다. 신이 나서 영어 문장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미술도 그랬다. 미술에서도 선 다루는 것이 능숙해지면 이것저것 그리고 싶어 진다. 왜 굳이 그 지겨운 선긋기 연습을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원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그리기 위해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초반에는 모르는 것을 익히느라 재밌다. 그러다 그 기술이 손에 익으면 생산성이 늘어나게 된다. 더 나아가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반복되는 패턴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선을 다루는 것이 능숙해지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족족 종이에 똑같이 옮기고 싶었다. 내 눈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되기 위해 한쪽 눈만을 뜬 채로 연필로 대상의 비례를 재고, 가장자리 선을 이어 소실점을 찾고, 팔을 컴퍼스 삼아 선을 그어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삼차원 공간의 물건이 이차원 평면 위에 옮겨졌다. 처음에는 비례와 투시가 틀려 맥주병은 와인병이 되고 음료수 캔은 바닥에 설 수 조차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사과가 되고 손에 잡을 수 있는 병이 될 때까지 똑같이 옮겨 그리는 방법을 알아가면서 그렇게 사과를, 맥주병을, 꽃을 종이에 옮겨 담았다.



1997년

그때는 동네마다 만화책,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어. 웹툰이 나오면서 이제 그 장소들도 추억이 되었네. 그 시기의 넌 만화책을 참 많이도 봤어. 만화책을 좋아하는 친구보다 더 많이 읽고 싶어서 순정, 소년 물 등 가리지 않고 봐. 네가 빌릴 책을 아주머니에게 가져가면 그분은 퉁퉁이 컴퓨터에서 네 이름을 입력하고는 바코드로 도서를 입력해. 누적 대여 권수가 늘어갈 때마다 넌 뿌듯해하지. 지금도 너는 동네 만화책방 한편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열심히 보고 있어.  


순정, 소년 물 가리지 않고 봤다지만  재밌게 본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순정만화가 많네. '꽃보다 남자', '하늘은 붉은 강가'는 재밌는 나머지 하루에 30여 권이나 되는 시리즈를 한 번에 다 읽기도 했잖아. 그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의 눈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팔다리는 얇고 긴 비정상적인 신체비율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네 눈에는 그 비현실적인 만화 속 주인공이 예뻐 보였는지 네 연습장은 그 주인공들로 채워져. 똑같이 그리기 위해 눈을 열심히 옮기고 세밀한 부분을 그릴 때는 숨도 참아. 그러면서 너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 너만의 캐릭터, 너만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책을 그리는 꿈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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