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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r 15. 2020

데생 2

피카소

고등학교 입학 후 첫 미술시간이 되었다.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순회지도를 하시고는 수업 끝나고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입시미술 해 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자 선생님께서는 지인이 운영하는 동네 조그마한 미술학원으로 나를 데려다주셨다.  

하루는 소묘를 담당하는 새로운 선생님께서 오셨다. 미술학원은 도제식이어서 전적으로 선생님을 따른다. 소묘 시간은 석고상, 정물, 사진 등을 보고 똑같이 그리는 식이었는데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선생님께서 봐줄 타이밍을 보고 그림을 고쳐주셨다. 내 자리에서 그림을 고쳐주시는 동안 나는 뒤에 앉아 선생님의 연필 잡는 방법, 세밀한 부분을 묘사하는 방법, 선 쓰는 방법, 대상의 형태를 잡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보고 머릿속에 새겼다. 그 시간은 그림을 지도하는 시간이면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기도 해서 은근히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이야기하는 시간에는 진로상담부터 시작해서 진학상담, 연애상담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물론 그중에는 성격 탓으로 선생님께서 그림 그리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학생도 있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날의 주제는 데생을 해야 하는 이유였다.

나는 선생님께 대상을 똑같이 이미지로 담을 수 있는 사진이 있는데 굳이 손으로 똑같이 그려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네가 원하는 것을 그리기 위해서'라고 일축하셨다. 고민의 여지도 없는 대답에 빈정이 상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어 대상을 분해해서 그렸던 피카소도 사실은 데생을 잘했다고 하셨다.

(좌) <암탉과 병아리들> 1941-42 / (우) <수탉> 1938

위 두 그림 모두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왼쪽은 사실적인 닭을, 오른쪽 그림은 닭의 특징을 살려서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의 입체파 그림만을 생각하고는 그가 사실적인 그림은 못 그리는 줄 알았다.

현실 속의 닭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방법을 알아야 실제 닭이 없더라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종이에 표현할 수 있다. 내가 닭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리는 방법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상을 똑같이 그리게 되면 대상을 단순화하는 추상화도 가능해진다. 그래서 입시미술 때 그렇게나 지겹게 훈련을 하듯 선을 다루고, 대상을 똑같이 그리고, 재료를 익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연장을 만드는 것이다.  



2006년

네가 중 3일 때 만화 입시 학원에 상담하기 위해 앉아 있어. 부모님도 없이 혼자 와서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원탁 테이블 맞은편에는 원장 선생님께서 앉아 계시고 너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씀드려. 그 날부터 너는 학교가 끝나면 그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게 돼. 언니, 오빠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투시도법을 배우고 한 주에 한 번씩 있는 원장님 직강의 만화수업도 듣게 되지. 대학교 입시에 너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뒷전이지만 만화를 본격적으로 배운다는 사실은 너를 설레게 해.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입시 예비소집을 하고 오는 지하철에서 너는 그날 네가 배정된 반을 담당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너는 다가가서 선생님께 말을 걸어. 넌 그 선생님께서 네가 시험 보는 반의 감독으로 들어오실 것을 알고 있었어. 선생님께서는 몰랐기 때문에 시험 당일날 반 맨 앞자리에 네가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셨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묘해서 너는 이런 우연은 행운이라고 괜스레 기대를 갖게 돼. 그러나 보기 좋게 불합격 통지를 받아 넌 낙담했지. 입시가 끝난 후에도 그 학원에 가. 그때는 자유로운 주제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됐기 때문에 너만의 단편 만화책을 만들고자 해. 만화 용지, 스크린톤, 스크린톤 칼, 펜촉, 잉크. 하나씩 장만한 만화 용품들을 사용해 한 칸 한 칸 채워나가.

만화의 주제는 작가들의 첫 작품이 으레 그렇듯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그제까지 입시의 틀에 맞춰진 그려야만 하는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그 모든 제한이 없는, 오로지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 작품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그 만화의 주제는 도시화로 인한 가족 붕괴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주인공은 독거노인으로 쓸쓸하게 죽을 날을 하루하루 맞이하고. 마지막 칸을 채우고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사뭇 진지한 주제에 공모전에 내야겠다고 추켜세우셔. 그것이 어린 학생의 노력에 대한 격려라 했을지라도 넌 네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겠지. 지금 그 만화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아쉬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네 그 어떤 작품보다 치기 어리고, 야심 찬 작품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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