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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r 21. 2020

커피

소소한 습관이 주는 행복

고등학교 때 자칭 십전커피탕을 마셨다. 제조법은 간단했다. 플라스틱 휴대 물통에 인스턴트커피를 밥 수저로 크게 2스푼 넣고 물 넣으면 끝. 그때 내게 커피는 잠을 몰아내 주는 약이었다.

대학생이 되자 우리나라는 커피공화국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1999년에 이화여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을 시작으로 커피는 바쁜 도시인들이 즐기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에 친구들을 만나면 파르페를 먹거나 체리콕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던 내게 커피 원두에서 추출한 밍밍하면서 씁쓸한 아메리카노는 즐기게 되기까지 훈련이 필요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 하루 커피 세 잔은 꼭 마신다. 일어나서 한 잔, 회사에서 두 잔. 출근해서 정신 몽롱할 때 마셔주면 정신이 바짝 든다. 입맛은 까다롭지 않아 블랙커피면 오케이. 그러나 내 몸은 카페인에 예민해서 저 세 잔의 두 잔은 양을 조절해서 마시고 있다.

흔한 대화 소재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커피 좋아하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 질문에 카페에서 만만하게 마시는 음료 중 하나이거나, 잠 깨려고 마시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커피 대안으로 잠 깨기 위해 마셨던 녹차나, 커피 대신 주문했던 여러 차들은 다 마신 적이 손에 꼽는다. 반면에 커피는 늦은 시간에 마시지 않는 이상 컵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시는 것 보면 이게 카페인 중독인가 싶다. 드립 커피, 콜드 브루, 에스프레소부터 캔커피, 인스턴트커피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제껏 마신 커피 종류만도 수십여 가지. 내게 커피는 이제 일상이다.


나만의 커피 사전

커피의 어원: 고등학교 입시 때 피곤해서 코피를 안 흘리기 위해 마시기 시작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각성효과로 코피를 없애준다는 변화형으로 농도에 따라 빛깔과 맛은 십전대보탕과 유사하다.

커피의 의미: 내게 커피는 소소한 습관이 주는 일상의 행복이다. 이동진의 <이동진의 독서법>을 보면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쾌락은 일회적이고 강렬한 것, 행복은 반복되는 소소한 것이라는 의미다. 일상은 습관들로 채워져 있고 습관이 좋으면 행복하다. 나는 아침에 커피와 함께 책을 읽고 사람들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커피와 함께하는 나의 소소한 습관은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준다.

커피의 역사: 나의 커피의 역사는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 학원에 인강까지 아침 수업만 시작하면 졸렸던 나는 부엌 찬장에서 우연히 맥심 인스턴트커피를 발견했고 피곤함을 덜어주는 커피의 효능에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에 대한 반응은 처음엔 좋지 않았다. 밍밍하고 씁쓸한 맛에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음료의 인기, 특히 카페인의 인기는 꺾을 수 없었고 결국 커피 중단령이 폐지되었다. 커피는 대학생이 되면서 인기가 더해졌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큰 인기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역시 가성비는 대학교 생협의 커피가 제일이었다. 이때 내 일기에는 "짙은 갈색의 차 같은 음료. 잠 깨거나 느끼한 것을 먹을 때 유용. 이것의 섭취자들은 사람들과 모일 때 한 잔씩 마심. 스타벅스 커피가 뉴요커의 이미지로 그중 단연 인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 당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도시인의 상징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급진적인 발전이 일어난다. 원두를 구분할 정도로 입맛이 예민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인스턴트, 캡슐, 드립 등 커피의 종류와는 관계없이 피곤함을 몰아냄과 동시에 커피를 즐기기 위해 하루에 세 잔은 마시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카페인에는 예민하여 마시는 양과 시간을 조절해야 했다.

인스턴트커피의 종류: g7(베트남 커피로 진한 커피), 카누(미니 사이즈가 있어 카페인에 예민한데 커피를 자주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 한 잔을 두 번 나눠 마실 수 있는 효과), 맥심(가성비 갑, 그냥 원하는 만큼 퍼먹자)



2020년 3월

너의 하루는 5시 15분에 시작돼. 이 기상시간의 시작은 대학생 시절에 교환학생 준비한다며 휴학을 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돈도 벌며 토플 시험공부도 할 수 있는 독서실 총무를 할 때부터 기상시간은 고정되었어. 넌 새벽의 착 가라앉은 공기와 푸르스름한 색깔, 아무도 깨지 않은 적막, 맑아진 머리를 좋아해. 직장과의 거리 탓에 아침의 여유도 1시간으로 줄었지만 넌 그 시간을 잘게 쪼개어 조그마한 습관들을 실천 해나가. 간단한 스트레칭 후 커피 한 잔, 사과 반 쪽과 함께 책과 영어 원서 1쪽을 읽고 나서 아침 식사를 해. 세안과 치장 등을 하고 나면 출근할 시간이 되지. 이런 소소한 습관들을 완수하고 나면 묘한 성취감도 들어.

너의 하루는 시계와도 같아. 출근해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업무를 보다 점심을 먹고는 산책을 가지. 오후 업무도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고 퇴근하고는 집에 와서 책이나 영화를 보고 일기로 하루를 마무리 해. 누군가 행복은 일상을 이루는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어. 위시리스트와 같은 것은 쾌락에 가깝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 행복해야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야.

너도 위시리스트,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가는 것이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그마한 습관들로 채워진 일상이 반복될 수 있음이 행복한 것임을, 오늘도 그 행복한 하루를 살았음을 깨달아가는 중이야. 오늘도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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