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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y 17. 2020

산책

규칙과 반복

아직도 내가 성인이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아직 정신은 미성년인 것 같은데 엄연히 나는 법적으로 성인이다. 성인임을 실감할 때는 점점 안정적인 것을 추구할 때이다. 내 삶과 가족을 책임지는 나이가 되니 확실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무선보다 유선이 좋다. 무선을 쓰면 언제 배터리가 닳고 연결이 끊길지 걱정하게 된다. 새로운 기기를 배우고 적응하는 것도 귀찮다. 그것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안정적인 유선을 쓰게 된다. 사무실에서 유선 마우스를 쓰는 사람은 나뿐이고, 최근에는 잘 쓰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버리고 굳이 유선 이어폰을 사서 쓰기도 했다.

모든 일상이 규칙에 의해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안정을 느낀다. 패턴화 된 일상도 그중 하나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져서 오작동이나 고장 없이 작동되는 것이 좋다. 내 일상의 패턴은 5시 기상, 1시 산책, 10시 반 취침이라는 사이클을 보인다. 격렬한 운동을 싫어하는 내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하루 30분 이상 산책하는 것이다. 나는 몸무게도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데 직장생활을 하니 쉽지 않었다. 밥 먹고 바로 앉아서 일하고, 회사에 비치된 간식을 먹으니 내 몸은 배만 볼록한 이티처럼 되었다. 사회초년생일 때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니 나만의 회사생활 철칙 같은 것이 생겼다. 간식은 줄이고, 점심에 무조건 산책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무조건 밥 먹고 나면 바로 신발 신고 뛰쳐나간다. 점심시간에 이야기가 길어지면 나 혼자서라도 먼저 일어나서 산책을 나간다.

출처: 픽사베이

산책에 더 집착(?)하게 된 2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다. 심리적 안정감이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전문의가 추천하는 방법 중에 산책이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요점은 산책을 하면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자극해주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칸트의 산책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나는 대학생 때 철학을 좋아해서 철학 수업도 듣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종종 철학 강의를 듣곤 했다. 전공이 또 미술 쪽이다 보니 칸트의 취미 판단이 흥미로웠고 내 졸업작품은 또 칸트의 숭고미와 연결되었다.

출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그의 생활은 인간 시계로 불릴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칸트는 매일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고 산책을 하여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간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이 거주한 지역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대학생 때는 그저 내가 관심 가는 분야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철학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생활패턴이 비슷한 것을 보니 괜히 나 자신도 칸트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동질성이 들었다.


2020년

너의 하루는 빼곡히 차있어. 출근 전에는 책을 읽고, 출퇴근 시간에는 강의를 보거나 경제시사 관련 팟캐스트를 듣고 퇴근하고는 못다 한 공부를 하거나 책, 영화를 보지.

그 하루 중에 여유가 있는 시간이 있다면 산책하는 시간일 거야. 산책을 하면서 고민 중인 문제를 생각하기도 하고 행복했던 시간을 곱씹어보기도,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해보기도 해.

산책을 하는 네 옆에는 직장 동료가 있을 때도 있고, 아무도 없을 때도 있어. 동료가 있을 때는 파티션에 사무적인 이야기만 하던 사이가 좀 더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서 좋고, 혼자일 때는 오로지 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  

회사는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산책코스를 찾기가 쉽진 않았어. 산책로는 나무가 아닌 빌딩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쉽긴 해. 적절한 산책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녀보고 결국엔 최적의 코스를 찾아내. 횡단보도로 흐름이 끊기는 것 없이 남은 점심시간을 꽉 채워서 돌 수 있는 코스야. 알면서도 그 코스를 다 돌고 나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딱 맞췄다는 사실에 작은 쾌감을 느끼기도 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산책하는 너의 일상이 좋아. 너의 시간을 찾고 반복된 규칙으로 패턴화 된 삶 속에서 너는 안정감을 느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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