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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Nov 01. 2020

사람을 위해 자리가 있는 게 아니다

소원은 조건절

명절, 새해에 소원을 빌 타이밍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산속 돌무더기라도 있으면 돌 하나 얹어 소원을 빈다. 무신론자이면서도 무언가 간절해지는 순간마다 신을 찾는 자신을 보면 보면 종교가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람은 힘들 때 만들어서라도 의지할 곳을 찾는 것이다.

신을 찾았던 순간은 물론 많았다.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났을 때 그랬고, 전공 결과가 발표됐을 때도 그랬고, 직장 합격 연락을 기다릴 때도 그랬다. 그때마다 '이번 한 번만'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간사하게도 그 소원이 이뤄지면 그때의 간절함을 잊는다.

소원은 조건부다. 소원을 이뤄주신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대학 합격만 되면 정말 열심히 살게.' 또는 '승진만 되면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할게요.'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 소원을 이뤄줄 대상에게는 내 소원 들어달라고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조건들은 차츰 또는 바로 잊어버린다.

공무원이 아닌 이상 회사 오래 다니기 참 힘들다. 경쟁에 치이는 것은 일정 부분 노력으로 해결될 수도 있는 부분이니 그렇다 쳐도 외부적 요건으로 치이는 것은 억울하다. 열심히, 아니면 적어도 남들 하는 정도로 했는데도 경영난, 특히나 요즘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 불황으로 회사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회사에서 필요한 자리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장인 자신이 철저히 상품이 돼야 한다. 회사의 이윤창출을 위한 업무와 직급이 있고 그에 맞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직장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싶다면 일을 잘하든, 인간관계가 좋든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여야 한다. 사람이 물건 취급당하다니, 인정하기 싫고 슬프지만 현실이다. 그것은 긍정주의자에게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비관주의자에게는 염세가 되었다.

회사에서 상사가 내 미래의 모습이라고들 한다. 한 직장의 상사는 회사일로 워라밸이 없었고, 다른 직장의 상사는 정치를 잘해서 자리를 지켰고, 또 다른 직장에서의 상사는 이직할 곳이 없어 회사에 남아있는 개국 공신이었다. 회사의 자리에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자리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가 있고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있고 자리가 있는 그런 '필요한' 사람, 아니 상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존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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