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피프티 피플’을 읽고
코로나로 오랜 기간 영화관을 끊었던 그가 오랜만에 선택한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였다. 장장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에도 그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 이름, 그가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이라는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영화관에서 그 긴 시간을 버텼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찾아본 서평에서는 이 영화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원작을 각색했다고 적혀있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 내가 쓰면 <남자 없는 여자들>이 되겠군’
그의 남자 없는 인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가 중학생이던 시절, 주위에서 여중, 여고, 여대를 간 언니를 보며 친구들과 ‘진짜 불쌍하다’며 비웃었다. 그랬던 그는 여고로 진학했다. 중학교도 그렇고 고등학교도 뺑뺑이여서 운이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설마…’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지만 그 두려움을 지속할 새도 없이 고3이 되었을 때는 여대도 상관없으니 제발 합격만 시켜달라며 지망대학에 손수 00여대 이름을 적었다. 합격통지서를 확인하고 새터를 다녀와도 실감이 안 나던 것이 강의 첫 수업을 듣고 나서야 이 상황이 실감 났다. 그때 그는 남의 인생을 쉽게 비웃지 말자고 다짐했다.
직장은 또 어떤가? 그는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렸고 잘 그린다는 칭찬에 이 길이 내 길이라며 다짐에 또 다짐, 대학도 서양화 전공으로 진학했다. 그때는 작가를 직업적 목표로 삼는 것에 남들과는 다른 고결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사회에 던져지자 그 자부심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았다. 우선 급한 대로 할 수 있는 직업은 학원 강사였다. 작가로서 자리를 잡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더욱이 그는 성격이 급했다. 남들에게 작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작업을 하며 기다릴 수 있는 진득함이 없었다. 직업 선택지에는 디자이너도 있었지만 작가라는 꿈과 자본주의라는 현실 간의 타협이라는 이상한 판단이 있었다. 결국 꿈은 꿈대로 유지하고 현실인 직업은 꿈과 무관한 것을 하자 싶었다. 무작정 문을 두드린 곳은 상대적으로 전공이 덜 중요한 홍보대행사였다.
그곳은 인턴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인 곳이었다. 그는 홍보 마케팅이 여초 중의 여초인 직군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마케팅 쪽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여중, 여고, 여대, 여직이라는 기록적인 라인을 만들어 갔다.
그는 이 남자 복이 지지리도 없는 팔자가 혹시 그날의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기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힘들 때마다 그게 뭐 대수냐고 으름장을 놓던 그의 어머니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는 그 격차가 더디고 낮아서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있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낙차는 빠르고 커서 현실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낙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벼랑 끝으로 떨어졌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는지, 혼자 떨어지기 싫은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겹게도 잡고 늘어졌다.
“여보야”
“자기야”
술에 취해 사용하는 저 말에는 사랑보다는 기어코 어머니에게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이 두 단어들은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게 만드는 파블로프 개 실험의 현실판이었다.
모질지 못했던 어머니는 그 팔을 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끌어올리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그는 힘들어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팔을 잡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같이 죽자고 하는 것 같아서 그 손을 놓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활동 반경은 점차 줄어들었다. 직장에서 집으로, 집에서 방으로, 그리고 중환자실 침대로. 그때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그날 중환자실 문 앞에서 의사는 엄마에게 덤덤히 말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그도 그 말이 주는 무게는 느낄 수 있었다. 말에 무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의 공기와 숨의 농도 때문일 것이다. 그날의 공기와 숨의 농도는 축축하고 짙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침대 곁을 밤새 지켰고 그와 언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들면서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엄마가 혼자 집에 돌아오던 그날, 소원이 이뤄졌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를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섬뜩함마저 들었다. 그날 이불속에서 빌었던 것은 소원이 아니라 저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가족에 아버지가 사라진 순간이 이 팔자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면 속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곤 한다.
본 에세이는 피프티 피플을 읽고 피프티 원의 인물로서 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