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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Apr 15. 2020

비디오 여행

내 취미는 영화감상

중학생 때부터 20대 중후반까지 노원구에 살았다. 그때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는데 만화책 못지않게 비디오는 내 단골가게 중 하나였다. 미닫이 식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비디오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이 있으면 케이스 표지의 포스터의 강렬한 문구와 뒷면의 설명을 보고 최종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출처: pxhere.com

고등학생쯤이었나 DVD가 나오고, P2P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경로가 생기면서 비디오 대여점도 사라져 갔다. 우리 동네의 비디오 대여점도 폐점의 기로에서 위태롭다가 결국 '폐업처분'이라는 글자를 붉은 글씨로 쓴 전지를 내걸고는 비디오를 떨이 판매하였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한번 좋은 물건 있나 살펴보려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비디오 대여점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고 대개 중년 남성들이었다. 당시 내 영화 취향은 내 나이또래들과는 조금 달라서 주인에게 '아이다호', '트레인스포팅', '바스켓볼 다이어리' 등이 있냐고 물어보자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남성 한 분이 나에게 '좀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네' 라며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이런저런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그 목록 중에는 '푸줏간 소년', '안티 크라이스트', '까미유 끌로델', '폭풍 속으로' 등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남들과 다른 것으로 정체성을 찾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의 취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고 추천까지 해주니 얼씨구나 싶었다. 특이한 영화를 좋아했던 나에게도 당시 '푸줏간 소년', '안티 크라이스트'는 조금 충격(?)이었다.

출처: pxhere.com

비디오를 보는 집에는 당시 비디오 클리너가 있어서 비디오 재생 시에 노이즈 같은 것이 생기면 비디오 클리너를 한 번 돌려줘야 했다. 그리고 비디오는 필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영상의 색이 변색되거나 가로줄 같은 것이 들어간다. 음반으로 비교해본다면 LP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집 거실장의 한 칸을 차지했던 비디오들은 이사 오면서 또 한 번 폐기 처분되었다. 요새는 블루레이라고 해서 옛날 영상도 선명하게 복원되고는 하는데 그 옛날 필름만이 주는 감성이 없어져서 오히려 이물감이 들 때도 있다. ('서스페리아'를 블루레이로 봤을 때 피는 케첩처럼 보였다.) 그때는 내가 보유한 영화 수가 몇 개인지 따지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제는 구독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소장가치의 시대는 저물어가는 듯싶다.


2020년 4월

네 취미 중의 하나는 영화 보는 거야. 한 때 취미 칸에 영화보기와 독서 감상은 진부한 것 중의 하나였는데 사실 그만큼 가성비 높은 대안을 찾기도 어렵지. 영화보기가 취미가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거야. 너는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성공한 감독들은 영화광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너도 영화광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해. 그때는 무조건 많이 보고 싶었어. 그리고 예술성이 있는 작품을 봐야만 된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있었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취향을 가졌다고 자부심을 느끼면서 말이야.

비디오를 빌려서 보면 앞에 공익 광고로 불법 복제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영상이 흘러나왔어. 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다른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다른 루트로 영화 홍보할 수 있는 루트가 적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다 보고 나서 반납하기 전에 필름을 되감아주는 것은 하나의 매너였지.

그러다 DVD가 나오게 됐어. 비디오보다 부피가 훨씬 적고 화질이 좋았던 DVD는 비디오 대여점을 비디오ㆍDVD 대여점으로 바뀌게 만들었지만 사실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서 그 대여점들도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 이제 너의 외장하드에는 다운로드한 영화들로 채워져. 그게 하나씩 하나씩 많아질 때마다 은근한 자부심이 생기지.

그러다 이제는 스트리밍이 대중화되면서 구독하는 시대가 되었어. 월구독 서비스만 신청하면 해당 채널에서 제공하는 영화는 무제한으로 볼 수 있지.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해. 그때는 어렵게 구해야 볼 수 있어서 한번 구한 영상은 끝까지 보고 '찾아서 소장한다'는 행위에 집중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에 영상의 가치나 노력의 보상의 정도는 떨어진 기분이야. 그 와중에도 네 심금을 울리는 영화라도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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