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나의 부모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 절대 부자가 아니다.
하지만 딸들에게,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느 부자 못지않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다고 자부한다.
참 신기하게도 이들의 주머니는 딸들에 한해서는 캐도 캐도 무언가가 계속 나오는 노다지와 같았다. 본인에게는 돈 한 푼 쓰는 걸 아깝게 여기며 아등바등 살아오셨지만 딸들이 하고 싶어 하고 먹고 싶어 하고 좋아한다는 모든 것을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려 애쓰셨고, 그렇게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었다.
이런 아낌없는 베풂 덕분에 방 한 칸에 거실 겸 주방이 있던 좁디좁은 반지하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집 근처의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 피아노 레슨이란 여자 아이들이 꼭 이수해야 할 필수 교양 과목과 같았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심지어 한 달을 다니다가 그만둔다고 해도) 피아노 학원 문턱을 한 번쯤은 넘어보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첫 피아노 학원은 그 동네에서 제법 규모가 있고 동네 엄마들의 입소문을 탄 곳이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학원에는 열 대는 족히 넘는 피아노가 있었고 수십 명의 학생들이 매일매일 레슨을 받으러 오고 갔으며 연 1회 정도는 외부에 공연장을 대관해서 자체 콩쿠르도 열고는 했다. 한 달 레슨비가 제법 비싸긴 했어도 같은 학교, 같은 골목에 살던 친구며 동생이며 언니 오빠들 대부분은 이 학원에 같이 다녔다.
우리 아빠는 딸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큰 손이셨다.
큰딸이 피아노 학원을 다닌 지 갓 한 달이나 지났을지 싶었던 어느 날.
하교 후 집으로 들어서자 딸이 기뻐할 모습을 볼 생각에 설렘과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올라있던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나를 반겼다. '짜라란~'하고는 방으로 내 손을 이끄시던 두 분. 어쩌면 나보다 더 잔뜩 신이 나신 모습이었다. 그리고 난 두 분에게 이끌려 들어간 방 창문 아래 예쁘게 놓여있던, 나와 내 동생만을 위한 '피아노'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 막 도레미를 치기 시작한 딸의 피아노 연습을 위해 멜로디언도 아니고 오르간도 아닌 진짜 '피아노'를 사시다니. 없는 살림에 피아노를 턱 하니 장만했던 아빠의 배포는 대체 얼마나 큼직했던 것인가가, 자못 궁금해진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남짓이 되자 어린 나에게 몇몇 연주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고모할머니네 삼촌의 결혼식이었다. 나를 너무나 아끼고 예뻐해 주셨던 고모할머니께서는 삼촌 결혼식에 피아노 연주를 청하셨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굳건한 의지로 결혼행진곡을 하루에 두어 시간씩, 엉덩이에 땀나도록 열심히 연습했었다.
이렇게나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했지만 안타깝게도 난 피아노에 재능이 없었다. (아빠에게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악보를 외우는 것에는 젬병이었다. 악보를 펴놓고 칠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연습을 해도 좀처럼 외워서 칠 수가 없었다. 결혼행진곡을 그렇게 연습을 했음에도 왜 손에 익지를 않는 것인가.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왜 머릿속은 음표 하나 남지 않고 하얘지는가. 연습을 하면 할수록,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린이의 시름과 자괴감은 짙어졌다. 결국 난 엄마에게 SOS를 보냈고, 이렇게 첫 공개 연주는 무산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많은 사람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피아노 학원 콩쿠르였다. 무슨 곡을 연주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예쁘게 차려입었던 하얀 드레스에 비하면 볼품없는 연주였음만이 어렴풋 기억난다. 성신여대 어느 홀의 무대 위에 올라갔었고, 무언가를 치긴 쳤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많은 대중 앞에서 연주해 본 경력이 1도 없던 어린이는 무대 위 그랜드피아노에 앉아 무언가를 뚱땅뚱땅 치고는 바삐 무대를 내려왔다. 관객들에게 무대 시작과 전에 인사나 제대로 했던가. 어찌나 긴장했던지 무대 위에 발을 닿았던 순간부터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의 모든 상황이 블랙아웃이었고, 다만 그 당시의 아찔했던 긴장감만이 내 몸 안에 아득하게 남아있다.
이렇게나 재능은 없었지만, 피아노가 내는 선율은 어린 나에게 그 어느 악기보다 아름다웠다. 악보를 떼고 즉흥연주를 할 수는 없다 해도 학원에서나 집에서나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와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더 아름답게 표현해 줄 능력이 없음이 아쉽고, 우리 집 피아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 내 동생은 나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악보는 잘 볼 줄 몰랐다. 그런데 선생님이 연주해 주시는 걸 보고 외워서 따라 칠 수 있는 능력자였고 난 그런 동생이 참으로 부러웠다.
이렇게 우리 가족과 동고동락하며 30여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던 피아노.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듯 피아노 역시 그만의 세월을 축적해나아 갔고, 조율을 해도 더는 소리가 맑아지지 않고 페달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들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정든 품을 떠났다.
보통의 물건이 아닌, 부모님의 딸들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던 그를 보내던 날의 시원섭섭한 마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025.08.07.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