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형 인간
누군가에게 나를 '전 OOO인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할 때 0순위로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침형 인간'이다.
지난 일기에서 언급한 적 있듯이, 난 꽤나 어린 나이에 시계에서 시간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던 새나라의 착한 어린이가 되고자 밤 9시에 취침, 새벽 5시면 조용히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와 옷가지를 챙겨 입고 6시면 유치원 갈 준비를 마치고서는 자고 있는 엄마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일어나길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만약 내가 엄마였고, 자다가 눈을 떴는데 어두운 방에 동그랗고 반짝이는 두 눈이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알아채게 되었다면 진심으로 소름 돋게 무서웠을 것 같다. 어후.)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등교나 출근이 늦어졌던 기억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이 말인즉슨, 나에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쉬웠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도 존재하는 제도인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세대의 국민학생과 초등학생 시절에는 '주번'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주번이 되는 주에는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청소를 하고 우유급식, 겨울에는 교실용 땔감(나무, 조개탄 등등)을 받아놓기도 하며 학급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곤 했는데, 난 이 주번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선생님들보다 일찍 나와서 교실 정리와 배급(?)소 앞에 줄을 서있기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난 매번 주번이 되는 그 주를 기다렸다. 적성에 꼭 맞았던 것이다.
이런 일찍 일어나는 강박이 정점을 찍은 건 중학교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 때는 아침형 인간의 부스터가 되어주던,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 더한) 아침형 인간인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했고 중학교도 같은 곳으로 배정받은 데다가 집이 가까워서 매일 걸어서 등하교를 같이하곤 했다. 그러던 우리에게 드디어 중학생으로서 맞이하는 첫 시험기간이 다가왔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를 앞둔 우리는 학구열을 불태우며 '새벽 일찍' 등교해서 공부를 하자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첫 시험은 그나마 인간적이게 아침 7시 등교를 목표로 집에서 출발했지만, 다음 기말고사, 그다음 중간고사... 시간이 지날수록 시험기간 중 등교시간은 점차 빨라졌다. 결국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에는 새벽 5시 반 등교를 하기에 이른다. 당직을 섰던 선생님이나 수위아저씨마저 숙면에 빠져계셨던 시간. 교실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란 출입문은 모두 잠겨있었고 시험공부는 하나도 못하고 수위아저씨께서 잠을 떨치시고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건물 앞에 멀뚱히 서서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추위와 싸우고 있었던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해가 뜨기도 전,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는 두 여중생이 걱정되었던 우리 부모님은, 혹여나 사춘기로 예민한 딸이 왜 따라 나오냐며 승질이라도 낼까 싶어서 교문을 들어서는 걸 확인하실 때까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조용히 뒤를 밟으셨다고 한다. (불효녀도 이런 불효녀가 없었네.) 이 사실을 알게 되고는 마음이 쓰리기도 했고,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고 해도 성적에 크게 영향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고등학생 때는 저런 유난을 떨지는 않았었다. 즉, 부모님도 전보다는 마음 편한 학부모가 되실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과도한 이른 기상은 내가 첫 직장에 취업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첫 직장은 서울의 한 대학교 행정팀이었다. 여기서 학장실 비서 겸 대학 행정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는데 당시 학장님이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아침형 인간'이셨다. 아침 7시면 이미 연구실에 출근을 하셨고 8시쯤에 학장실에 오셔서 업무를 보셨던 것이다. 그 학교 직원의 출근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었지만, 당시 학장님 전담 비서였던 언니와 그 보조를 했던 나는 7시 반 정도면 사무실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퇴근이 늦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른 기상의 시작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는 엄마와 나, 내 동생이 한창 다이어트에 버닝 할 때였기도 했다. 아침에 집 앞 개천을 따라 1시간 정도 걷기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곤 했는데, 가뜩이나 출근시간이 이른데 운동까지 하고 가려니 새벽 4시 반 기상이 불가피했다. (어쩌면 난 요즘 유행하는 미라클모닝을 그때부터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었나 보다.) 1년 넘게 지속된 이 강박에 가까운 패턴은 그즈음 소개팅으로 만난 구 남자 친구, 현 남편과의 연애가 시작되며 점차 사라져 갔다.
사실 영혼의 단짝인 내 남편도 (나보다는 덜하지만) 아침형 인간이다.
남편과 나는 집과 회사 사이 거리가 멀다. 각자 하루 중 출퇴근에 소요하는 시간이 2시간 전후이기 때문에 아침 7시면 집을 나설 채비를 끝내야 하고, 이 출근시간을 맞추려면 6시 전 기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보다 30분을 더 일찍 일어나고 있다. 아침 출근 전, 둘이 조용히 즐기는 드립커피 한 잔의 여유에 폭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고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짧지만 피로를 녹여주는 드립커피 한 잔과 둘만의 오붓한 수다는 수면과 맞바꾼 시간을 보상해 주고도 남을 정도로 소중하다. 이렇게 또다시 우리 부부만의 미라클모닝이 진행 중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왜 늦잠을 잘 수 없는 건가? 쉬는 날에도 새벽같이 눈이 떠지고 잠이 안 오는 거지?"
라는 생각과 함께 이른 기상이 강박처럼 느껴져서 힘들었던 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강박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보듬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기도 하고, 사실상 나는 아침에 조용히 할 일을 사부작사부작해놓는 게 훨씬 능률이 좋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아침이 주는 활기와 고요함, 안정감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난, 앞으로도 자타공인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갈 예정이다.
2025.07.31.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