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샘
엄마에게 전해 들은 바, 상꼬맹이 시절 나는 눈물샘이 막혀있었다고 한다.
눈에 염증이 잦았던 나를 데리고 간단한 안약 처방을 받으러 찾은 소아과에서 의사 선생님이 내린 진단명은 '얘 눈물샘이 막혔네요.'였다. 그 당시 엄마가 가진 육아상식의 범위에서는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진단명이었음이 분명하다. 뭔가 큰일이라도 난 듯 어린 나를 끌고 급하게 안과를 찾았으니까.
얼핏 스치듯 드는 내 기억 속에도 엄마의 다급한 손과 눈물샘을 뚫으러 방문했던 생애 첫 안과 진료실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눈물샘이 정상작동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였을까.
그간 울지 못한 것을 다 쏟아내려는 듯, 나는 찐 울보로 다시 태어났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가 눈물샘을 괜히 뚫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으니.
유치원생 시절은 내 인생에서 고지식함이라는 단어가 정점을 찍었던 때였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따르던 아이였고 유치원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라는 그 당시 어린이 필수덕목은 고지식함으로 중무장한 내가 어린이로서 꼭 지켜야 하는 삶의 수칙이었다.
그럼 유치원 선생님의 워너비였던 새나라의 어린이는 대체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가. 무려 밤 9시에는 잠이 들어서 새벽 6시면 유치원 갈 채비를 마쳐야 했다. 어린 내가 이해하는 범위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 규칙을 따르지 못할 어떠한 경우의 수가 발생하게 된다는 건, 곧 나의 눈물샘이 팡하고 터질 것임을 의미했다.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낮에는 일하시느라 바쁘셨던 부모님은 애지중지 첫째 딸에게 바람도 쏘여줄 겸 즐거운 볼거리를 선사해 주시고자 서울대공원 야간개장을 가셨다. 가족끼리의 오붓하고 웃음 가득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그들의 어린 딸은 차마 봐서는 안 됐을 무언가를 보게 된다. 바로 대공원에 있던 대형 시계였다. 또래에 비해 시계를 빨리 읽기 시작했던 이 어린이는 대공원 안에 있었던 대형시계가 저녁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에, 아직도 이불속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는 사실에 초조함과 강박감에 휩싸인 채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울음보가 터져서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딸을 둘러업고는 급하게 집으로 향했던 엄마와 아빠의 당혹스러움이 어땠을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1분 1초가 다급했던 동화 속 신데렐라도 어린 시절의 나를 이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낯선 이를 만나고, 낯선 환경에 뚝 떨어지는 것 역시 참을 수 없는 눈물 포인트였다.
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갔다. 익숙하고 친했던 유치원 친구들과 헤어져서 눈 씻고 찾아봐도 익숙한 이를 찾을 수 없는 낯선 학교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 배정받은 낯선 교실, 낯선 선생님과 낯선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애써 울음을 꾹 참고 있던 나. 내가 울음을 참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운도 지지리 없었던 새 짝꿍은 괜히 '너 어디서 왔어?'라고 살짝궁 질문을 던졌다가 그 대답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세례를 받았다. 전학 온 새 짝꿍을 울렸다는 선생님의 꾸지람을 연타로 받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친구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샘솟는다.
심지어 대학생 시절에도 어이없이 터져버렸던 눈물샘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창 영어공부에 빠져 있었던 나에게 제본해서 소장하고 싶었던 영어 스크립트가 있었다. 집에 프린터가 고장이라 셀프 인쇄를 할 수 없었던 김에 아예 인쇄소에 인쇄와 제본을 맡기려고 파일이 담긴 USB를 가지고 성신여대 앞 인쇄소 중 한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사장님께 스크립트 제본을 부탁드렸더니 이런 걸 굳이 제본을 할 필요가 있겠냐며 내 요청을 거절하셨다. 순간 '아니 내가 필요하다는데,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제본을 안 해준다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내 눈물샘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울음을 꾹 참느라 꾹 다문 입 사이로 말 한마디라도 새어 나오게 된다면 눈물도 같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던 절체절명의 순간. 고개만 끄덕이고는 문을 박차고 인쇄소를 나왔다. 대체 무엇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었는지는 나조차도 아직까지 이해불가한 모멘트였다. 어쨌든 서둘러 복사집을 나와서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맨손으로 닦아내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클수록 점점 눈물의 빈도는 잦아들기는 했지만, 문득 떠오르면 자다가 절로 이불킥이 나갈 정도로 이상한 포인트에서 눈물샘이 터지는 현상은 20대까지도 계속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나를 통과해서 흘러간 시간은 그 길이만큼 나를 점점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 걸까. 마흔의 나는 예전만큼 눈물에 헤프지 않게 변해가고 있다. (삼십 대에 있었던 오만가지 격정의 순간들이 내 감정의 굴곡을 완만히 다듬어주며 조금이나마 눈물꼭지를 조여준 덕분이지 않나 싶다.)
사람의 천성이 변하지 않듯 나라는 사람이 눈물이 온전히 메마른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나 역시 그렇게까지 메마른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내 눈물샘이 좀 더 TPO에 맞게 열리고 닫혔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해본다.
2025.08.05.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