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12.

유난스러운 동생사랑(2)

by Ellen Yang


돌이켜보면 동생과 나는,

그녀가 태어나고나서부터(동생의 시간 안에서는 태어난 직후부터) 내가 결혼하고 독립하기 직전까지,

거의 25년이라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거의 떨어져 본 적 없이 붙어있었다.


일단 같은 방을 썼고 같은 침대에서 잤다.

한 방에서 지내며 서로 비밀이야기를 나누고, HOT와 서태지 팬으로서 함께 '덕질'을 하며 우리의 책상 한편 보물함을 그들의 굿즈와 사진으로 가득가득 채우기도 했고, 별밤 같은 라디오를 밤늦게까지 함께 듣고 녹음하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둘이 너무 코드가 잘 맞으면 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간혹 서로 의견차로 삐지거나 토라졌을 때에도 자야 할 곳은 한 곳, 등을 돌리고 자더라도 미우나 고우나 같은 침대 위에서 잤어야 했다. 이러한 공간의 공유는 우리 자매의 우정을 더욱 견고히 하는 데 제대로 한몫을 해주었음이 분명하다.


어린이에서 청소년, 성인이 되면서 각자의 삶의 키를 부여잡고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파도가 이는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느라 바빠지면서 물리적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어갔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같은 침대에 누워 하루에 있었던 웃긴 일, 황당한 일들들을 어두운 방 안에서 조잘거리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행복했던 기억이다.

(지금은 내 반쪽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자매의 '잠정적' 독립은 내가 대학교 3학년 시절, 어학연수를 가게 되면서였다.


대학교 1학년 겨울에 동아리 활동으로 참여했던 영어연극을 하면서 내 영어 실력에 좌절했던 난, 영어를 본토에서 정말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간절함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가계사정에도 불구하고 딸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부모님께서는 1년간의 영국 어학연수를 선뜻 허락해 주셨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설레는 마음 한편에는 1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서, 그것도 밤마다 동생 없이 혼자 잠들 생각에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어쩌면 동생은 드디어 혼자 방을 쓴다는 해방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어학연수의 설렘과 걱정은 20년 가까이 시간을 머금으며 빛바랜 감정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 당시에 동생에게 들었던 미안함은 아직도 꽤나 선명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이미 영국에서 다닐 어학교 등록, 항공권 구입이 모두 완료된 상태에서 엄마의 갱년기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그 해는 동생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나야 집 떠나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면 그만이었고 지금처럼 영상통화나 보이스톡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의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비싼 국제전화요금에 일주일에 하루,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통화도 쉽지 않던 그때, 나한테 말도 못 하고 엄마의 우울증, 이로 인한 부모님의 불화를 고3인 동생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동생이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는 청소년이 아니었던 게 그나마 다... 행이었달까...)


그렇게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한국. 동생은 재수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난 그간 마음에 켜켜이 담아두었던 미안함을 보상하고 싶었고, '수험생의 학부모가 된 것처럼' 열심히 동생의 재수를 뒷바라지했다.(이때 내 요리실력이 꽤 많이 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생은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어도 전보다 좀 더 취업에 유망한 학과에 진학하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만날천날 동생과 둘이 붙어 다니며 데이트를 했으니 굳이 연애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나.

그러나 주변에서 보기에는 20대 후반이 되도록 연애를 하지 않는 내가 꽤나 안쓰럽게 보였던 듯하다.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 연애를 응원하던 대학교 동아리 선배로부터 주선받은 인생 첫 소개팅 자리에서 내 나이 27살에 지금의 남편, 내 짝꿍을 만났다. 이렇게 내 연애를 시작으로 동생과 나는 몸도 마음도 조금씩 예전보다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짝지와 내가 만 2년이 넘는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는 일주일에 몇 번 문자를 주고받는 정도가 다였으니까.


갑자기 문득 결혼을 네 달 정도 앞두고 있었던 내 생일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주던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내 곁을 함께해 주던 엄마와 아빠, 내 동생만이 오롯이 챙겨줄 생일은 왠지 그날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진한 잉크처럼 물들이며 한없는 슬픔이 쏟아냈다. 슬픔은 전염이 된다. 동생도 엄마도 울음보가 터졌다. (지방에 계셔서 부재중이던 아빠도 같이 계셨다면 이 눈물바다에 동참하셨을 거다.)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은 슬픈 생일이었다.




내가 결혼 후 3년 정도가 지나고, 동생은 영국으로 어학연수와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나이에 제한이 있는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하루라도 빨리 가기 위해서 그간 인정받으며 일하던 직장도 쿨내 나게 그만두었다. 그리고 훌쩍 떠나버린 동생은 영국생활 2년 차 무렵, 결국 그곳에서 인생의 반쪽을 찾아내었고, 국제결혼을 했다. 귀여운(?) 영국신사가 우리 가족으로 합류하게 되었고 말이다.


지금은 편도로만 13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를 가야 만날 수 있는 내 동생.

이만큼이나 멀찌감치 떨어지려고 어린 시절을 그토록 붙어 다녔던가 싶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은 멀어지지도 바래지도 않고 여전하다.


결코 쉽지 않을 타국에서의 생활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영원히 너를 향해 애정을 뿜어대는 언니가 여기 있음을,

그 우정과 사랑은 영원히 ing 임을 잊지 말아 주길.




2025.08.13.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