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27.

머리 하던 날(1)

by Ellen Yang


지난주 일요일 아침.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머리를 손질하러 미용실로 향했다.

그날은 월중 행사인 짝꿍의 커트와 함께, 나 역시 앞머리 부분에 볼륨매직을 예약해 둔 날이었다.


완전히 직모인 아빠와, 그에 반해 꼬불파마를 하지 않아도 이제 막 파마로 뽑아낸 것 마냥 야무지게 똘똘 말려있는 엄청난 곱슬머리의 소유자인 엄마의 만남.(엄마의 형제자매 모두 외할머니로부터 곱슬머리를 타고났다.)

우리 자매로서는 안타깝게도, 아빠의 직모 유전자는 엄마의 엄청난 곱슬머리 유전자를 이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동생보단 좀 더 아빠의 직모 유전자를 낙낙히 챙겨 받은 나는 앞머리는 반곱슬, 뒷머리는 그보다는 덜 심한 반곱슬머리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엄마보다는 덜 곱슬거린다고 해도, 내 머리칼은 특히나 요즘 같은 습하고 더운 여름날에는 고데기와 드라이기로 땀 뻘뻘 흘리며 다림질을 한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금 고불고불해지곤 한다. 이런 탓에 내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려면 분기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들여 스트레이트 시술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덥고 습한 여름을 나면서 점점 약발이 다해가는 곱슬머리를 정리하려고 미용실을 들렀다가, 문득 고등학생 시절에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러 간 미용실에서 사기(?)를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반곱슬 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손끝에 가시와 같은 존재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곱실거리는 앞머리를 열심히 드라이어로 펴고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한창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이트 파마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말 그대로 사흘 밤낮을 조르고 졸라서 엄마와 함께 미용실로 향했던 나. 설레는 마음으로 인생 첫 매직파마 시술을 받게 된다.


거울이 보여주는 변화하는 내 모습.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이 좍좍 직모로 탈바꿈되던 내 눈앞 광경은 내면에 짜릿한 쾌감이 일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도 10만 원이 넘어가던 스트레이트 펌을, 머리가 자라서 예전처럼 꼬부라지기 시작하면 다시 이 비싼 돈을 또 들여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긴 해도 이 펌이 내 인생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게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등학생이, 부모님께 생떼를 쓰며 반년에 한 번씩 미용실에 돈 좀 붓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는 데에 나도 나름 양심의 가책은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발품을 팔고 알음알음 정보를 수집해서 반짝 특가로 단돈 5만 원에 스트레이트 펌을 해준다는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즐거운 겨울방학과, 신나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날이었다.

성신여대 근처 번화가 골목 어귀에 자리하고 있던 미용실 입구를 들어섰다. 그간 여러 차례 매직을 하러 미용실을 방문했지만, 언제나 엄마, 동생 또는 친구와 동행이었고 혼자 미용실을 찾았던 적이 없던 내 마음에는 제법 긴장감이 역력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카운터에 예약자의 이름을 말하니 예쁜 (그러나 무언가 좌중을 압도할 듯 강한 아우라를 뿜어내시던) 여자 디자이너께서 나에게 가운을 입혀주시고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둘 사이엔 크게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절차에 따라 파마약이 내 머리카락을 하얗게 뒤덮었고, 이내 랩이 머리 전체를 감싸더니 열기를 뿜는 기계가 머리에 씌워졌다. 한동안 따듯한 온기가 가득했던 머리카락은 미지근한 물세례를 받으며 독한 약품을 뱉어냈고, 디자이너 선생님께서는 한껏 젖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려주시고는 고데기로 쭉쭉 펴주시며 시술을 마무리하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도 나름 경력자인데, 무언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끝났다고 해서 돈을 내고 미용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내내 찜찜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할 때 즈음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날 받은 시술에서는 중화제를 바르는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래, 이 집 파마약은 여기까지만 해도 스트레이트가 되는 건가 보지 뭐.'라고 웅얼이며 애써 괜찮을 거라며, 별 문제없을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이틀 후 머리를 감으면서 나의 이 찜찜함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세상에. 머리가 파마하기 전이랑 똑같이 꼬불거렸던 것이다.




뭐지. 다른 곳에 비해 반값인 이유가 중화제를 아낀 비용이었던 건가?

거울 속 곱슬머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소중한 시간, 알뜰살뜰 용돈을 모아서 마련한 피 같은 돈이 제값을 하지 못했음에 분노가 일었다.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소심하게) 씩씩거리며 다시 찾은 그 미용실. 마침 카운터에는 그 디자이너분이 서계셨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지만 카운터부터 그분을 마주치니 백번 넘게 되뇌고 되뇌던 멘트들이 입 밖으로 겨우 새어 나왔다.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요... 엊그제 저녁에 와서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머리를 감으니 이렇게 다 풀렸어요..."

약간은 당황한 듯한 눈빛이던 디자이너분은, 이내 이런 민원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내 머리를 요리조리 만져보셨다. 그 틈에 준비한 멘트를 하나 더 날렸다.

"그때 중화제를 안 바르셨던 것 같아요."

그러자 픽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올라가던 그분의 입꼬리. 눈으로는 '내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니?'라는 말을 쏘아댔다. 그리고는,

"원래부터 파마가 잘 안 먹는 머리카락이에요. 그리고 머리를 만으로 이틀은 감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감았어요?"

오히려 나를 질타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 어떤 미용실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내 머리카락이 파마가 잘 안 되는 머리라는 이상한 이유를 대며 나를 몰아세우던 그녀의 기세에 풀이 죽어버렸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내 결국 이럴 줄 알았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이내 미용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나. 정말 바보천치가 따로 없었다. 그쪽의 잘못이 분명했음에도 다시 해달라거나 보상을 해달라는 말을 입도 뻥끗 못 한 나 자신이 그 어린 나이에도 그저 한스러웠다.


미용실 문을 들어설 때, 전투 의지가 가득했던 내 배경음악으로 신나게 울려 퍼지던 길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미용실 문을 나설 때에는 억울한 내 마음처럼 구슬프게 들리기 시작했다.




2025.08.28.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