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29.

머리 하던 날(3)

by Ellen Yang


원장님은 직원을 따로 두지 않으시고 혼자서 미용실을 운영하셨다. 그리고 한 번에 고객 1인에 집중하자는 원장님 나름의 샵 운영 철학이 있으셨기 때문에, 특히나 나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시술은 예약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나 주말에 머리를 하려면 적어도 한 달 전에는 미리 이야기를 해두어야 했다.




파마약이 기운을 다하여 곱슬머리가 잡초처럼 올라올 기운을 보이던 어느 여름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장님의 손길을 예약했던 토요일 오후.

원장님 역시 언제나처럼 내 머리카락에 약을 정성껏 발라주셨고, 원장님께서 내 손에 들려주신 날짜가 한참 지난 (어쩌면 지난번에 봤을 수도 있는) 잡지를 들추며 머리카락에 약이 스미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다림 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날의 스케줄에 없던 동네 할머니의 급작스런 등장이었다. "머리 좀 바짝 말아줘 봐."라는 외마디 말과 함께 굵은 나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떼시며 미용실의 무거운 유리문을 살며시 여시던 할머니. 그녀의 깜짝 등장에 원장님의 얼굴은 시름이 드리워졌다.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을, 아무리 봐도 여든은 훌쩍 넘기신 듯 보였던 할머니께 오늘은 안된다는 말로 단칼에 거절을 하실 수 없으셨던 원장님은 결국 할머니를 시술의자에 앉히시고는 자잘한 파마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말기 시작하셨다.




갑작스레 난 그 미용실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나도 나름 스트레이트 펌을 수년간 받아온 사람으로서, 머리에 파마약을 바르고 꽤나 긴 시간이 지났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할머니께서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내시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타발 수다 폭격을 감행하고 계셨던지라 그 틈을 비집고 원장님을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장님께서는 아예 그 샵 구석에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내 순서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음을 완전히 잊으신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난 결국 말 대신 "('저 여기 있어요.'라는 의미로) 큼큼" 헛기침을 뱉었고, 할머니 머리 위에서 돌돌 롤을 말고 계시던 원장님의 손놀림이 잠시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는 원장님의 눈에 꽉 차 있던 당혹스러움. 할머니께 급히 양해를 구하시더니 세면대에 급하게 날 눕히고는 머리를 감겨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래, 약이 머리카락에 더 잘 스며들었을 테니 잘 펴지고 오래가지 않을까.'라는 긍정 마인드를 열심히 주입하며 내 안의 걱정 인형을 다독였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머리가 마르고, 고데기가 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펴는 모습을 거울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이미 염색약이 한 차례 훑고 간 자리에 스트레이트 파마약을 장시간 묻히고 있었던 내 불쌍한 머리카락. 긴 머리 전체가 타버렸다. 분명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건만 어깨를 훌쩍 넘던 머리카락 전체가 자글자글 악성 곱슬이 돼버린 것이다.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원장님의 동공도 나만큼이나 흔들렸다.


그렇다고 여기서 시술을 멈출 수는 없었던 원장님. 그녀는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뜨겁게 달궈진 고데기로 내 머리카락 전체를 정성껏 다리시고 중화제를 발라주셨다. 우리 둘 다 중화제가 제발 머리카락을 원상복구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이미 타들어간 머리카락이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원장님께서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미 내 마음도 파마약과 200도 가까이 달궈진 고데기로 타버린 내 긴 머리카락만치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의 흔적은 수년간 나를 따라다니다가 새 머리카락이 단발머리 길이만큼 자라나고, 긴 머리를 똑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나서야 그들 모두와의 이별이 가능했다. (세월이 약임을 몸소 깨달았다.)


엄마는 아직도 그분께 새치염색과 커트를 받으러 다니시지만 난 그 뒤로 단 한 번도 원장님을 본 적이 없다. 원장님도 나도 서로 안보는 게 서로의 심신의 안정을 위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난 강하게 민원을 넣기보다는 발길을 끊음으로써 불만을 표현했다.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머릿속이 바빠지며 막장드라마 한 편은 족히 나올법하게 시나리오를 짜다가(시나리오만 짜다가) 결국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던 소심했던 어린 시절의 나.

만약 지금의 나에게 같은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그래도 한 살 한 살 늘어가는 마음 나이테가 여렸던 속마음을 한층 한층 감싸주면서 제법 단단해진 요즘은, 불만이 있으면 적시에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래도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먹음이 반갑지만은 않다가도 이런 게 나이먹음의 좋은 점인가 싶기도 한 요즘이다.




2025.08.30.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