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42.

나의 과일나무

by Ellen Yang


이제 정말 가을인가 보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하기까지 한 시원한 바람이 옷 안을 파고든다.

아침저녁의 선선한 날씨와 더불어 정말 가을이 성큼, 추석도 성큼 다가왔음을 제일 빠르게 알 수 있는 건 무엇보다 마트 안 과일코너인 것 같다.


빨갛게 잘 여문 사과와 한 손에 잡기에 힘들 정도로 큼직한 배, 영롱하게 반짝이는 밤알들이 나란 나란히 쌓여서는 얌전히 사람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짝꿍과 내가 기르던(?) 충청도 어느 과수원의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떠올랐다.




우리가 만난 지 1년 남짓 되던 어느 봄, 짝꿍은 나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우리 충청도에 있는 과수원에 사과나무하고 배나무 하나씩 분양받을까?"

갑작스러운 과수 분양 의사 확인 질문에 생각회로에 몇 초간의 버퍼링 후, 문득 내가 과일나무, 특히나 좋아하는 사과와 배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과수의 1년짜리 오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설렘이 퍼져갔다. 나의 대답은 당연했다.

"완전 좋아!!!"

이 말과 함께 짝꿍은 회사에서 충청도의 한 마을과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에 신청서를 넣었고 우리 둘은 그렇게 사과와 배나무를 한 그루씩 가진 꽤나 멋진 성인이 된 거 같았다.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과수원 주인 분들께서 모든 나무들을 정성껏 아껴주시고 보살펴주시고 분양을 받은 우리 같은 임시 주인들은 그저 과수가 주렁주렁 열리는 가을에 내려가서 각자의 나무에 열려있는 사과와 배를 수확해 오면 되는 거였다.


아주 손끝만큼 작은 의무를 동반한, 이름만 주인이기는 해도 '우리 명의'로 된 두 그루의 과수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심어준 의미는 꽤나 컸던 것 같다. 충청도의 일기예보에 괜스레 눈이 가고 태풍, 이상기온에 예민해졌던 그 해. 거친 풍파를 잘 견디고 맛있고 탐스럽게 잘 영근 사과와 배를 내주기를 마음속으로 자못 간절히 바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여름에 한 번, 우리의 나무를 확인하고 과수가 잘 열릴 수 있게 적화작업을 하러 들른 과수원에서 나무 두 그루와의 첫인사를 나누었다. 농사의 ㄴ도 모르는 둘이지만 과수원 주인 분들께 받은 속성 과외에 따라 나무들을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가지 이곳저곳을 정성껏 손질하고는,

"가을에 잘 부탁할게."

라는 (나무 입장에서는 약간 부담스러웠을 법한) 인사를 남기고 수확철에 다시 올 것을 기약했다.


그리고 이내 무덥던 여름의 기운이 한 발짝 저만치 물러가던 날, 과수원으로부터 수확기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음에 속으로 '앗싸! 신이 난다 신이 나~'를 외치며 우리 나무들이 열심히 키웠을 사과와 배를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주 주말, 새벽부터 바지런히 작업복을 챙겨서는 과수원으로 부리나케 향했다.


나는 즐거움과 설렘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지만, 짝꿍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늘 부장님께서 가족분들과 오신다던데..."

"에이~ 설마 같은 시간에 가진 안겠지. 과수원 넓던데 만나기 쉽지 않을걸?"

별 걱정을 다한다며 다독였지만, 이내 콧노래 소리가 줄어들며 즐기러 가는 과일 따기가 체험 삶의 현장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은근한 걱정에 살큰 올라왔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입이 방정이었나.)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던 볕 좋은 가을날이어서였는지 우리 말고도 많은 분들이 과일을 수확하러 오신 듯했고, 우리는 기어코 짝꿍의 부장님 가족을 만났다. 바로 옆 나무에서.

옆 나무를 분양받으신 부장님 가족은 그 나무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셔서 가을소풍을 만끽하고 계시던 중이었다.


이미 동공에 지진이 난 우리는, 애써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고 격한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사과와 배 수확에 나섰다. 이대로 부장님 가족과 함께 할 수는 없었고, 최대한 빨리 따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했다. 쉬엄쉬엄 가을 햇살과 바람을 조용히 즐기며 사과와 배를 따려던 우리의 계획은 거품처럼 이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포로 돌아간 계획에 괜한 서러움이 밀려왔지만, 종이 안에서 선명한 붉은빛을 띠며 맛있게 영근 사과알, 묵직하고 단단하게 익은 배들이 우리의 마음을 구석구석 위로해 주었음이 다행이었달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노동으로 이마에 주르륵 땀이 흐르고 어깨와 허리가 아프다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손을 거쳐 하나 둘 카트에 쌓여가는 과실들을 보고 있자니 먹지 않았어도 이 과일들의 달콤함이 몸 안에 젖어 들어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 과수원에서 과일 좀 따봤다는 능력 있는 일꾼들 마냥 삽시간에 사과와 배를 카트 가득 싣고서, 과수원에서 주는 큼직한 과일박스가 닫히지도 않게 사과와 배를 가득 담아낸 우리는 부장님 댁에 작별인사를 고하고 바로 서울길에 올랐다. (이제야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 나무와 맞닿아있던 부장님네 사과나무 가지가 우리 것인 줄 착각하고 몇 개 꿀꺽했다는 사실. 죄송합니다, 부장님... 고의는 아니었어요!)




비록 이 좋은 가을날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지는 못했음이 아쉽다가도 차 안에 가득 실린 과일들에 마음은 무척이나 풍성했던, 가을이 수확의 계절임을 인생 어느 때보다 확실히 알아챌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던 건 확실하다.


아쉽게도 그다음 해부터는 이 프로젝트가 이어지지 않아서 더 이상 어느 과수원에 우리를 위해서만 과일을 열어주는 나무를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때는 꼭 두 그루씩 분양받을 거야. 그리고 소중한 이들에게 우리가 수확한 알차게 영근 과일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나눠주어야지!'


+ 이제 우리가 그때의 부장님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소오름.

++ 어쩌면 후배님들께 우리가 불편한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흠칫!




2025.09.12.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