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44.

생일의 의미

by Ellen Yang


며칠 전, 오래간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이번엔 언제 만날래?"

이 시기에, 친구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누군가의 생일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리고 조만간 다가오는 생일의 주인공,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국민학교부터 같은 동네, 가까운 학교를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여학생들은 이제는 어엿한 대한민국 아줌마로서 성인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다. 이십 대 중반에 취업을 하고 서른 즈음 하나 둘 결혼을 했고 서로의 집 사이의 거리가 시와 시의 경계를 넘나들만치 멀어짐과 동시에 직장과 집안에 산적해 가는 일들로 무거워진 일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야, 당장 나와. 얼굴 보자!"를 외치기엔 멋쩍은, '쟤 왜 저래..?'란 웅얼거림과 눈흘김이 자동반사되어 나오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누군가가 생일을 맞이하면 축하해 주고픈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이때만큼은 꼭 시간을 내어 서로의 얼굴을 보곤 한다. 다만 큰 맘먹고 몇 주 또는 몇 개월 전부터 미리 약속을 정해야 한다는 게 함정. 그래도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있다는 게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코로나 시기에는 심지어 2년간 고작 4명이서 연간 3번 있는 모임(넷 중 둘이 11월생이라 매번 합동 생일모임을 하기 때문이다.)마저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아이가 있는 엄마들은 혹시나 만남 뒤에 졸졸 달고 올 수도 있을 바이러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아예 만남 자체를 셀프차단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그나마 2022년 이후부터는 (여름에겐 미안하지만 여름은 건너뛴) 계간 모임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전만큼 신이 차오르지는 않는다. 이제는 코로나가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먹으며 생일이 반갑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그나마 친구들과는 생일 근처로 모임이라도 하건만, 언젠가부터는 가족끼리는 생일날 아침 간단한 메시지나 용돈만 입금하는 선에서 비대면으로 서로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있다.

심지어 가족 간에는 시와 도, 심지어 국경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리감을 두고 있어서 더더욱 "우리 얼굴 좀 봅시다."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오지 않는다. 따로 시간을 내어 밥을 먹고 축하노래를 부르며 생일케이크의 초를 후하고 부는 대면 축하 절차를 했던 게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족끼리 생일에 얼굴도 안 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일수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서로에게 야박스럽게 구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부부의 양가 가족 모두는 각자의 생일은 각자의 일정대로 잘 보내면 되는 거라고 뜻(?)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이렇게 보내는 게 익숙해져가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생일이 침 별거였는데.

생일이면 내가 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는데.

수십억 명의 지구인들 중 그날만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 같았는데.


어른의 삶을 살아오면서 생일에 맞닥뜨리는, 생일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쏟아지는 궂은 일과 슬픈 일들을 받아낼 때가 다른 평범한 날의 그것보다 더 크고 서럽게 마음을 저릿하게 만듦을 알게 되었다. 좀 덜 서럽고, 좀 덜 슬플 방법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부러 생일을 별 게 아닌 걸로 여기자는 다짐이었던 거다.



내가 평일 아침 출근길마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가 있다.

영국영어 발음을 계속 귀에 익히려는 목적이 시작이었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원어민 영어강사분들이 나누는 다양한 주제의 일상대화 자체가 재밌어서 이제는 꼭 학습의 개념이라기보단 그 나라의 일상과 문화적인 차이를 발견하는 것에 재미가 들려 챙겨 듣곤 한다.


그런데 그 팟캐스트에서 얼마 전에 들었던 에피소드 중에 뇌리에 확 꽂힌 문장 하나.

그날은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두 분의 선생님께서 '생일'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셨는데, 그중 여자 선생님의 말이 내 뒤통수를 '통'하고 치며 지나갔다.


"I always feel like, Haha, I’ve cheated death for another year! I am still here!”


그분께 자신의 생일이란, 너무나 특별한 날이랬다. 선물보다는 지인들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특별한 날. 그리곤 지난 일 년 또 이렇게 죽음이라는 녀석을 잘 따돌리고 난 여기 아직 살아있음에 의기양양해지는 그런 날.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을 왜 난 그동안 내 마음속 저쪽 구석 그늘 어디엔가로 밀어놓고는 매정하게만 대했던 걸까 싶은 후회가 밀려오며 내 생일에게 너무나 미안해져 버렸다.



이번 생일은 이제 정말 에누리 없이 만까지 꽉꽉 채운 마흔을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일이 내 앞에 남아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간 음지에 가두어 둔 미안함을 씻어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많이 축하해 주고 아낌없이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지난 한 해도 무사히 넘겨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2025.09.14.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