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그에게 빠지다
요즘 내가 드센 늦바람이 불어 진득한 사랑에 빠진 이가 있다.
이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는 바로, 에스프레소이다. (짝꿍, 미안.)
원래도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삼시세끼 밥은 챙겨 먹지 않아도 커피는 꼬박꼬박 챙겨마시는 이 중 하나다. 심지어는 중간중간에 디저트로도 커피를 챙겨마실 정도로이니 하루에 세 잔은 기본으로 들이켜고 있는 거다. 다만, 우유와 가깝지 못한 사이라 대부분은 아메리카노, 핸드드립이나 콜드브루를 골라가며 마신다.
이렇게 블랙커피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나에게도 에스프레소는 차마 가까이하기엔 너무 쓴 당신 같은 존재였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2주 전쯤이었나.
짝꿍과 함께 오랜만에 강남 나들이를 계획했다. 전부터 눈여겨보아 둔 강남구청 쪽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오랜만에 방문한 강남을 이대로 벗어나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소화도 시킬 겸 입도 정화할 겸, 지도앱을 켜고는 괜찮은 카페를 물색하다가 그 근처(라기엔 조금 먼 위치에 있는) 카페 한 곳이 우리의 눈에 훅 들어왔다. 구테로이테(Gute Leute)라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이었다.
나는 처음 들어본, 생경한 이름의 커피전문점이었지만 짝꿍은 전에 지인들과 (다른 지점이었긴 하지만) 이 에스프레소 전문점을 방문한 적 있다고 했다. 블랙커피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짝꿍이 이곳의 에스프레소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그 좋은 기억을 나도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배도 부르겠다, 마침 제법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따라 한발 두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카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카페 안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귀여운 에스프레소잔들이 두어 잔씩 층층이 올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잔들을 바라보며, '그래, 나도 여기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셔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이 카페의 유경험자인 짝꿍이, "여기는 에스프레소 오마카세가 있어. 코스로 마셔볼래?"라는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제안을 한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예전에 어느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마셨다가 (당연히 전문점이 아닌, 프랜차이즈 카페 중 한 곳이었다.) 한약보다 쓰고 아릿한 맛에 정신이 어질 했던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에스프레소를 찾아 마셔본 적이 없었던 내가, 무려 에스프레소가 코스로 나오는 메뉴를 만나보겠다고 바 자리에 앉아있자니 우려 섞인 기대감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바리스타님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내주신 음료는 기본 에스프레소. 위에 크레마를 수저로 살짝 떠먹는데 쌉싸름함에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확 퍼졌다. 참기름 한 방울이 입안에 흩뿌려지는 느낌이었달까. 눈이 휘둥그레진 난 바로 한 모금을 홀짝였고,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쌉싸름함 속의 고소함을 찾아냈다.
"와... 이거 너무 고소한데?"
나의 찐 리액션에 바리스타님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다음으로 우리 앞에 나온 메뉴는 플랫화이트. 쌉쌀한 에스프레소는 우유 친구의 매력에 힘입어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라테보다는 훨씬 진하면서도 우유의 풍미가 잘 살아있던 그 맛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나. 우유에 애초에 거부감이라곤 없었던 듯 혼자 플랫화이트 잔을 놓지 않고 야금야금 마시는 내 모습을 보던 짝꿍은 자꾸 "우유 괜찮아?"를 묻는다. 민망하게. "일반 라테랑은 다르게 이건 우유가 엄청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괜찮을 것 같아."라고 먼산을 보며 대답하는 내가 웃겼는지 피식거리는 짝꿍.
그 뒤로도 설탕, 코코아, 크림, 우유와 레몬셔벗을 품은 에스프레소의 무한변신을 눈으로, 코로, 입으로 만끽하며 그를 향한 내 닫혀있던 마음은 활짝 열렸고, 그의 무한한 매력에 폭 빠져버리고 말았다.
요즘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바쁘다.
내가 매일매일 에스프레소 앓이와 타령(?)을 반복하는 통에 에스프레소 맛집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는 장대같이 내리 꽂히는 빗속을 뚫고 에스프레소 코스를 만나러 집에서 무려 차로 한 시간이 넘는 분당까지 가는 수고도 불사했던 우리 부부. 아마 우린 이 가을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함 속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중독된 게 분명한 것 같다. 예전의 나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와 이렇듯 달콤 쌉싸름한 사랑에 빠지다니.
예전엔 그저 익숙지 않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것들도 어느 순간, 그간 몰랐던 매력으로 마음속을 훅 파고들어 올 때가 있다. 이 에스프레소처럼 말이다. 그의 매력에 갑작스럽게 퐁당 빠져서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생각보다 즐거운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로부터 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이, 앞으로 찾아올 나의 인생에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심심하지 않도록. 매일이 즐겁도록 말이다.
2025.09.30.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