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전의 쾌감, 지략전의 짜릿함
2014년 여름에 개봉했던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무려 1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 역대 흥행 순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명량>이 이렇게까지 흥행할 수 있었던 건 최민식이라는 대배우의 존재감도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남다른 의미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명량> 이후 8년 만에 개봉하는 <한산: 용의 출현>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매 작품마다 다른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한다는 점이 상당히 독특한데 이번 작품에서는 최근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서 열연을 펼쳤던 배우 박해일이 최민식에 이어 '이순신'을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전작 <명량>은 흥행 면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작품 자체는 아쉬움이 많았었죠.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던 부분이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과도한 신파였죠. 김한민 감독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이번 <한산>은 전작과는 다르게 최대한 담백하게 그려내려고 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주인공 '이순신'은 물론이고 인물들 개개인의 사연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는 한산도 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에만 포커스를 맞춘 채 양 측이 신중하게 전쟁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을 그려내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편끼리의 이견으로 인한 내분이나 첩자 등의 요소를 더해 흥미로운 전개를 펼쳐내죠.
<한산>은 인물들의 사연을 최소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명량> 때보다도 캐릭터들의 매력도 더 잘 부각되고 있습니다. 박해일 배우는 <헤어질 결심>에서는 상당히 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활을 쏘는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정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움직임을 최소화한 덕분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무게감이 더 잘 표현됐던 것 같습니다. 변요한 배우 역시 치밀하면서도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냉혹한 '와키자카' 캐릭터의 카리스마를 인상 깊게 그려내면서 전작들과는 색다른 매력을 뽐냈고 안성기, 손현주, 김성규, 박지환 등의 조연 배우들도 저마다의 개성을 착실히 잘 드러내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한껏 높여주고 있죠. 상대적으로 옥택연, 김향기 배우의 존재감은 다소 애매했지만 이마저도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역시나 클라이맥스에 펼쳐지는 해전씬이죠. 전작인 <명량>에서도 이야기 전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후반부에 1시간 넘게 펼쳐지는 해전씬은 큰 호평을 받았었는데 이번 <한산> 역시 바다 위에서 화포를 쏘아대며 싸우는 배들의 모습을 통해 <명량>만큼 빼어난 해상 전투 장면을 연출해냅니다. 무엇보다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이 등장하는 장면은 다소 극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 비주얼에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함은 왜 적군들이 거북선을 보고 공포감을 느꼈는지 관객의 입장에서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위압감이 엄청났고 거북선이 빠른 속도로 돌진하며 왜군의 배들을 박살 내는 장면은 굉장한 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해전씬에서 또 좋았던 점은 단순히 액션의 스케일만 강조하지 않고 회심의 작전인 학익진을 성공시키려는 '이순신'과 이에 걸려들지 않으려 하는 '와키자카'의 치밀한 지략전도 잘 부각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 해상 전투씬이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큰 화포 소리나 인물들의 함성 소리에 묻혀서 대사가 잘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대비해 한국어 대사에도 자막 처리를 했는데 최근의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대사 전달이 잘 안 되어서 아쉬웠던 작품들도 여럿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선택은 아주 좋았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변수 때문에 분명 전작만큼의 엄청난 흥행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한산: 용의 출현>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평가는 전작 <명량>보다 더 좋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노량: 죽음의 바다>도 <한산>과 동시에 촬영을 끝마친 상황인데 <노량>도 이 정도의 퀄리티로만 나와준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