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앙세 : 약혼자
프랑스어.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가 다른 프랑스어에서 남자는 fiancé ,
여자는 e가 하나 더 붙어 fiancée
발음은 '피앙세'로 같다.
히로의 집은 생각 보다 공항에서 꽤 멀었다.
'하루카(はるか)'라는 특급 열차를 타고 쿄오토 역에서 로컬라인으로 갈아탔다. 다시 버스나 차를 타면 종착역에 도착해 거의 2시간 넘게 걸렸다.
'우지(宇治)'라는 이곳은 쿄오토 외곽의 조용하고도 주택들이 밀집된 도시였다.
가는 동안 열차 안에서 일본 여고생들의 모습은 별나라 세계였다. 루즈 삭스에 엄청난 미니스커트, 메이크업을 쉬지 않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무거운 책가방을 서너 개씩 들고 책을 읽는 모습도 있었다.
히로는 오는 길 전차 내내 나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그간 전화 통화와 메일로 이야기했지만 부족한 듯 나의 정보를 얻으려 계속 이야기를 했다.
약간의 틈에 내가 물었다.
" 회사는 어때?"
히로는 기다렸다는 듯,
" 그게... 쿄오토가 아니고 본사가 오오사카야. 너무 멀어. 하지만 모두 출퇴근하는 사람들 많아 좀 힘들어. 그래서 나 지금 사원숙사에서 있어. 주말엔 부모님 집으로 가끔 오고."
" 그럼 당장 월요일 출근은?" 하고 물으니, 6시 기상해서 출근한다고 했다.
오는 내내 히로는 자기가 생각한 나와의 일들에 대해 말했다.
한국에 내가 있는 동안 신입사원이면서도 쉬는 날에는 일본어 학교를 알아보고 다녔던 것이다.
히로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내가 머무를 방을 보여주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의 방이었는데 퇴원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며 제일 큰 방을 부모님이 내게 내어 주셨다.
완성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주택이라 다다미의 연한 녹두빛 이구사(藺草: いぐさ) 향이 은은했다.
히로의 엄마가 오느라 피곤할 테니 먼저 씻으라고 하시며 욕실로 나를 안내해 주셨다.
욕조 안에는 히노키의 향이 나는 입욕제가 들어 있어 긴장감과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씻고 나와 거실에 앉아 히로 엄마와 내일부터 일본에서 무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 주택의 욕실에는 욕조물의 온열 보온 조절과 인터폰의역할을 하는 콘트롤러가 있다. 일본 사회가 고령화가 되어 감에 따라 실버 제품의 개발이 계속 되고 있다.삐이 삐삐삐 삐이 삐삐삐!
어디선가 작은 알람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버튼을 히로의 엄마가 누르자 스피커 폰으로 " 욕조 물이 왜 하나도 없어?" 하고 욕실에서 히로 아버지가 연락을 하셨다. 일본은 욕실 안에 거실과 부엌이 연결된 컨트롤러가 있었다.
두 분의 대화가 일본어라 잘 알아듣지 못했다.
히로의 엄마가 서둘러 욕실로 가시더니 두 분이 박장대소를 하셨다.
거실로 돌아오신 히로의 엄마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엘리아짱, 일본에서는 가족들이 모두 한 욕조를 사용해. 그러니까 순서대로 욕조를 사용하고 마지막에 들어간 사람이 욕실 정리를 해요.
오늘은 엘리아가 처음으로 사용하고 나오면 그다음사람 순으로. 엘리아가 쓰고 난 욕조물을 정리했나 보네.
그래서 저 양반이 저러는 거야. "
이런 문화가 있다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위층에서 내려온 히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가 일본어로 빠르게 설명하자,
" 앗! 가르쳐 주는 걸 까먹었다! 미안 미안!" 하며 웃었다.
나의 일본 문화 체험 첫날은 이불 킥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히로가 출근해 있는 동안 대부분 그의 어머니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몸이 작고 목소리가 조용한 전형적인 일본여성이었다. 가족사부터 히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영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남편 따라 뉴욕에서 고생한 이야기부터 수십 년간 외국 생활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끝이 없었다. 영어로 간단히 요점만 이야기하면서도 가끔 설명이 부족하면,
" 역시 영어로 설명하면 생각해야 하니 늙은이는 힘들어." 하며 웃었다.
" 히로가 캐나다 있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엘리아가 많이 만들어줘서 자기 체중 늘었다고. 귀국해 얼굴이 좋아진 거 보고 알았어.
고마워요. 일본에 있는 동안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거 다 알려줘."
라고 하셨다.
일본 전통 아침식사(朝食)의 조합
히로의 엄마는 일본 요리의 특성, 식기의 쓰임새, 음식과 관련된 문화와 예절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다.
한국과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음식의 맛과 문화들은 대하면 대할수록 신기했다.
역사와 지리의 차이로 하나의 식재료의 조리법과 그 음식을 담는 식기 또한 많이 달랐다.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버릇없다고 혼나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한국과 같은 쌀문화권이지만, 일본은 테이블에 밥그릇을 올린 채 식사를 하면 예의에 어긋난 것이 식기의 재질에 따라 우리와 다름을 지금은 느낀다.
히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혼자 집까지 찾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휴일에는 히로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칸사이(関西) 지역을 관광하기도 했다.
비자가 관광 비자여서 채류기간은 짧았다.
어느 날인가 입국 심사를 하는 때였다.
입국심사관이 영어로,
" 일본에 자주 오네요. 이 주소는?"
" 네, 약혼자(fiance) 부모님 주소입니다. "
라고 답했다.
" 음.. 약혼녀(fiancee)라....
가능하면 빨리 혼인 신고하세요. 일본이란 나라가 출입국 심사 때 젊은 여성의 출입국이 잦으면 관리국에 쓸데없이 걸립니다."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해 보니 무슨 의미인가 알 것 같았다.
비즈니스나 학업이 아닌 사람의 잦은 방문은 여러 가지 불법적인 일을 상상하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국 돌아가는 길에 히로가 내게 물었다.
" 엘리아, 일본 어때? 캐나다 하고 다른 부분이 많아. 나도 일본인 부모 아래 자랐지만 외국인은 적응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아버지 학교 가는 도중의 미술대학이 일본어학과 가 여기서 제일 가까운데. 일본에서 일본어 배우면 어떨까?"
내가 답했다.
" 응. 뭔가 알듯해. 외국인에 대한 시선은....
하지만 학비는 어떡해? 지금 내가 그런 여력이 말이야.."
히로가 말을 가로챘다.
" 내가 지금 당장 일본에서 일하는 이유가 엘리야 일본어 학비 모으는 거야. "
말문이 막혔다. 히로의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해서 생활에 적응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란 나라가 싫지 않게 적응하며 가족과 가깝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히로는 말했다.
" 학생비자로 변경하기까지 심사 기간이 걸리긴 해. 일본에서 보증인은 아버지와 내가 설 테니 걱정 말고.
만약에 엘리아가 일본이 싫어지면....
그때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건 엘리아 자유야."
진지하게 설명하던 히로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히로가 말한 미술대학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잠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