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을 즐기는 호수 풍경의 화룡점정, 오리! 호수에 생명력을 넣는 강력한 존재죠. 어느 봄날 파랑 도화지 위의 수채화 붓처럼 물 위에 유유자적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발견해요. 점점 호수와 오리는 세트가 되어 익숙해져 가요. 언제나 거기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이요. 그런데 어느 뜨거운 여름날, 어느샌가 물 위에서 미끄러지는 붓질이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갔지? 더 이상 그림을 볼 수 없나 싶었어요. 걱정 반 궁금 반으로 바라본 텅 빈 물도화지. 호수가 멈춘 듯 덩그러니 고요만이 남았어요. 아쉬움이 오리 대신 밀려왔죠. 오리는 다시 호수를 찾을까?
여름 끝자락 어느 날, 오리‘s back! 다시 붓질이 시작되었어요. 호수의 푸르름이 더욱 시원해 보여요. 풍경이 완전체로 완성이 된 듯 느껴졌어요. 이렇게 반갑고 예쁠 수가!
‘익숙한 존재의 소중함은 사라져야 비로소 알게 된다’
물 위에서 노는 오리는 언제나 익숙했어요. 마치 그곳이 너의 집이려니, 천적 없는 이 호수가 네가 있는 곳이려니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사라져 안 보이니 허전했어요. 에너지를 잃은 것처럼 미동이 없었어요. 호수는 텅 비어 보였고, 평화롭다기보다는 허전함이 컸죠. 빈집처럼 온기가 없는 풍경이었어요. 오리 없는 호수는 앙꼬 없는 찐빵이구나!
가까이 있어서 익숙해진 존재의 소중함을 우리는 잊고 살아요. 익숙하니 제쳐 두고 생각해요.
아니 사실은 소중하다는 생각을 늘 한다는 것이 어렵죠. 마치 늘 마시는 공기처럼요. 함께함으로 얻어지는 평화로운 일상은 당연함이 되고요. 반대로 함께함으로 발생하는 낯선 일들은 크게 부각되어 신경을 쓰게 만들어요. 낯설기에 시선이 가고 관찰하게 되잖아요.
사람 관계도 같아요.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놓치고 사는 관계들이요. 특히 가족관계가 그래요. 부모자식관계, 부부관계, 형제자매관계처럼 항상 같이 생활하는 존재는 익숙함의 세월이 길죠. 소중함을 잊고 살기 쉬워요. 그래서 소중한 감사함이 익숙한 당연함으로 감정 바뀜이 되죠.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바뀌어 있어요. 그래서 익숙함은 자각하기 힘들고 낯 섬은 쉽게 인지되어 존재를 알리나 봐요.
당연해진 익숙이는 존재를 드러내지도 않아요. 고요하죠. 그래서일까요? 방치가 쉽고 소중함을 잊기 일쑤죠. 항상 되내며 감사함을 느끼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쉬운 가요. 습관이 세월을 먹어 굳어지면 권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해요. 최근 부부이혼 전문변호사의 말이 생각나네요. 상당히 많은 남편들이 이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첫째 부인이 밥을 안 차려줘서, 둘째, 시댁에 연락을 자주 안 해서. 뭔 케케묵은 소리냐 하겠지만 아직도 중년. 노년 부부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많다는 거예요. 갑자기 고구마 10개 한꺼번에 쑤셔 넣은 느낌!
익숙이 방치가 몰고 온 서운함은 관계에 따라 회복탄력성이 달라요. 자식관계, 형제관계는 쉽게 회복이 되는 편이죠. 왜일까요? 피를 나눈 사이니까요. 생물학적 연결 고리는 피의 당김이 있어서 쉽게 제자리를 찾아요. 하지만 부부사이는 작은 스크레치도 자국이 남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죠. 특별히 조심히 다뤄야 하는 예민한 가족관계, 부부사이입니다.
부부는 혈연이 아니에요. 법이 정한 가족이죠. 동맹의 관계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다른 가족과 다른 관리가 필요해요. 금이 가기 시작하면 부서져 버릴 수 있어요. 도자기처럼요. 깨진 도자기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하잖아요. 귀하게 다뤄야 익숙함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어요.
익숙함은 왜 무뎌지고 존재를 감출까요? 존재를 자주 알리면 실수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편안함 때문이에요. 익숙함은 편안함과 단짝입니다. 둘은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내 곁에서 존재가 흐릿해요. 그래서 일상에서 소중히 다뤄지기 힘든 이유죠. 어느 순간 사라져서 불편을 느낄 때, 그때가 존재를 알리는 순간이에요.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죠. 불편이 밀려와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빨리 익숙함으로 회귀하고 싶어 해요. 다시 익숙한 편안함에서 일상을 찾고 싶은 거죠. 아쉽게도 우리는 항상 익숙한 일상을 감사하지 않아요. 당연하게 여길 뿐.
익숙이는 묻히고 불편이는 드러나는 부부사이.
공유가 많은 부부사이는 세월만큼 익숙이도 비례성장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편리한 일상으로 나타나요. 같은 집, 같은 주말, 같은 가족을 공유하면서 굳이 말로 전할 필요 없이 척하면 착 알아채죠. 작은 행동만으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죠. 미세한 표정만으로도 왜 그러는지 교감할 수 있어요. 익숙이가 만들어준 편리한 일상 속에서 깨알 변화를 쉽게 알아채는 사이가 부부사이라는 거죠.
그러면 부부사이 불편이는 언제 등장할까요? 익숙이가 사라지거나 다른 형태로 나타날 때 느껴요. 미주알고주알 말 많던 부인이 언제부턴가 침묵한다거나, 특별한 이슈가 아닌데도 하염없이 붙들고 무한반복 썰로 재생한다면 상대는 피곤해지죠. 불편이 자라는 거예요. 익숙이 일상이 불편이로 변하고 있는 거예요. 맥주 한잔에 함께 주말 영화를 즐기던 시간이 어느새 사라졌다면 불편이가 자라고 있는 거예요. 부부사이의 불편이는 낯 섬의 형태로 진화가 빨라요. 부부의 낯 섬은 회복탄력성이 혈연가족보다 떨어짐을 기억해야 해요. 부부의 익숙함을 귀하게 잘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편안했던 일상이 사라짐의 의미니까요.
어쩌면요, 불편이 변화된 형태로 모여진 창고가 익숙함 일 수 있어요. 모든 불편은 시간차를 두고 익숙해지잖아요.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예외 없이 새로운 불편을 맞고요. 하나씩 올 수도 있고, 동시다발 묶음으로 배송될 수도 있어요. 하나씩 익숙함으로 보내는 과정이 우리가 만드는 일상이고요. 그러니 고민 없는 날이 없다며 불평하지 않아도 돼요. 고민은 익숙이 창고로 보내질 가공 중인 재료니까요.
호수는 붓질하는 오리가 있어 더 아름다운 풍경이 완성되죠, 익숙과 불편은 우리 일상에 함께 공존해야 더 균형 잡힌 인생으로 사는 거네요. 넓은 호수품에서 오리가 놀 듯, 거대한 익숙함 속에서 크고 작은 고민과 불편이 공존하는 거죠.
기억해요. 익숙이의 고마움을. 부부사이 고요한 익숙함은 귀하게 다뤄야 함을. 금 가기 시작하면 부서질 수 있음을. 그리고 불편함이 사라진 인생은 적막하다는 것도요. 마치 오리가 사라진 호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