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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청년 Oct 15. 2023

부장님이 집으로 발령 나셨어요!

은퇴 후 집안 살림 간섭, 내전의 도화전이다.

은퇴 후 일상생활 적응, 쉽지 않다. 가장 힘든 것이 남아도는 시간이 문제다. 출퇴근할 때와 은퇴 후의 하루 체감길이는 엄청나다.

월요병으로 시작한 한 주는 어느 순간 주말이었다. 마치 중간 요일을 스킵한 느낌이었다. 평일에 늦잠 한 번 실컷 자고 싶은 것은 소원일만큼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갈망하던 나만의 하루가 너무 길어졌다.

긴 하루, 은퇴가 건네는 첫 선물이다.


남아도는 시간, 그렇게 원하던 늦잠도 잘 수 없다.

잠이 안 온다. 심지어 출퇴근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 그냥 눈이 떠진다.


출근을 위해 바삐 준비하던 시간을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한다.

기분 좋게 아침 운동으로 산책을 시작한다. 여유 있게 즐기는 아침 공기가 새롭다. 30년 넘게 부산했던 아침과는 사뭇 다른 아침이다. 적당히 나쁘지 않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마음 한 켠에 있지만 일단 이 또한 현실이라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산책 후 가족을 위한 아침을 준비해야지 나름 기특한 생각도 한다. 가족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것, 평소 못했던 거라 뿌듯함이 먼저 밀려온다.


‘달그락달그락’ 기찻길 교차로의 기차 알림 같은 소리가 집안을 채우면 가족들은 생각한다.

‘무슨 소리지?’, ‘뭔가 다가오고 있다!’


토스터 바닥에 쌓인 빵부스러기가 보인다.

‘에고 여기 청소해야겠네’.

계란 꺼내려고 냉장고를 봤더니 계란이 1개밖에 없다.

‘에이 계란 좀 채워 놓지’.

프라이 하려고 기름을 꺼내는데 양념 놓인 자리에 기름때가 굳어 있는 게 보인다.

여기 얼마나 안 닦은 거야?’


부인이 아침 인사 하면서 나온다.

토스터 바닥 청소하고 있는 내가 한마디 한다.

‘이거 그때 그때 청소해야지 지저분하잖아!’

이 한마디가 내전의 도화선임을 아는가?



은퇴자의 행동 및 생각 알고리즘은 이렇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개선 사항 접수)

지적이 시작되고, (담당자에게 훈계 및 지시)

시정 여부 확인을 계속하고, (검수 및 체크)

변화가 미약하면 (능력을 의심하고)

아예 안 하면 (어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권위에 도전하는 군!)


직장 생활에서 베인 생각과 흐름이 그대로 투영된다.

아쉽게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다.




가족의 생각 알고리즘이다.

안 보던 것을 보기 시작하는 군 (하... 이 건 뭐지?)

지적까지?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살다가 웬 간섭?)

심지어 체크하네? (내가 부하직원인가?)

대충 치워? (기분이 안 좋지만 잠시 참자)

안 해! (어디서 회사에서 하던 습관을 집으로 갖고 와!)


익숙한 일상에 감시자가 생긴 느낌을 받는다.

아쉽게도 가족은 부장님과 함께 할 앞날 생각에 짜증이 난다.

 



은퇴 후 가정생활 분란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행동들이 부정적 시그널로 전달되는 거다. 부인에게는 영역 침범이고 아이들에게는 항공모함급 잔소리포가 도입된 거다.

은퇴 후 가정에서 붉어지는 흔한 불협화음이다.


내가 하지 않던 것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간섭은 안 하는 게 좋다. 안 듣던 잔소리 투하는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인에게는 더 그렇다.

아이들은 꼰대 거름망이 후천적으로 발달해서 알아서 처리한다. 피하거나 듣는 척하는 것으로 자가 치유한다.

하지만 부인은 아이들보다는 더 친밀한 거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마찰을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다.


내가 청소하고 싶으면 기꺼이 하면 된다.

불평의 소리가 동반되거나 표정이 어두워서 무언의 신호를 보내도 안된다.

내가 하지 않을 거면 그냥 패스가 낫다. 개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치우거나 요청하면 서로 불편해진다.

나의 좋은 의도가 가족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접근은 일방적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잘 지내던 일상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일 수 있다. 아니 스트레스다.


상사로서 관리하던 직장 습관을 가정으로 들인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집안의 관리 팀장은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라.


어느 날 누가 내 팀에 오더니 감 놔라 콩 놔라 간섭을 해댄다면 어떤 느낌인지 쉽게 이해된다.

직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팀장의 승인이 있는 행동이 현명하다.


조건 없는 배품도 잦으면 부담이다. 영역 침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인데 무슨 영역? 가족 안에서도 분명 경계가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평화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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