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불협화음에서 음악이 되기까지”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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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은 600여 년의 시간 동안 한양과 지방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성곽을 허물어 신사 터를 짓거나, 전차나 버스 교통 시설을 들이기 위해 성곽과 연결된 4대문, 4소문 일부가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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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인은 우리나라의 좋은 땅을 거주지로 삼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용산역 철도기지 일대와 북촌이었다. 용산역은 조선시대부터 물류 교통의 중심지로 일찌감치 외국군의 먹잇감이었으며, 북촌은 한양의 중심부이자 궁과 인접했다. 그 앞은 송현동 부지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었다. 좋은 것은 늘 탐하던 그들이었기에, 두 지역은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땅에 깊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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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거주하던 일본인은 거주 반경을 혜화동까지 넓혔다. 한양도성의 동북 문인 혜화문에서 따온 혜화동의 지명은 혜화문이 동네의 뿌리임을 말해준다. 거주지 확장이 성곽을 허물고 혜화문을 훼철하면서 몇십 년간 혜화동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동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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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전시 안내센터’가 성곽 위에 자리하고 있는 건, 동네의 정체성을 잃고 얻은 결과물이다. 안내센터는 문화주택 양식으로 빨간 기와지붕에 모르타르를 바른 외벽이 특징인데, 건물은 일본 본토 주택의 전형을 가지면서 가난과 주택 난에 시달렸던 백성과 달리 상류층 일본인을 위한 주택이었다. 때문에 문화주택은 우리나라의 시대나 형식에 맞지 않는 불협화음 덩어리였다. 소유주가 변경되고 그곳을 서울 시장의 공관으로 사용하면서 성곽을 허물고 지어진 땅 위에 다시금 시민을 위한 정책 논의 일터가 마련된 건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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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한양도성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혜화문이 복원되었고, 주변 성곽도 복원되기 시작했다. 성곽 하부 구조에 있는 문화 주택 일부는 철거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건물 전체의 철거를 논의하기도 했다. 33년이라는 시간 동안 13명의 서울 시장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만들어낸 근현대사의 역사와 일본 주택에서 여러 차례 보수하며 담긴 한국인의 솜씨, 재래식 구법은 역사적 가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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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주택은 서울 시장 공관을 거쳐 한양도성의 역사와 건물의 역사, 역대 시장의 시정 활동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여 전 국민에게 개방되었다. 목구조로 지어진 주택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썩은 기둥과 보는 철골로 교체되었고, 주택 뒷마당에서 남겨진 성곽 하부 구조는 집의 일부를 덜어내어 노출했다. 외벽은 매끈하게 다듬어 문화주택 양식을 강조했으며, 천장을 드러내 한국인의 손때 묻은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건축은 그저 드러내고 정돈하며 보존했을 뿐인데 잘 다듬어져 서로 조화롭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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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보존하거나 리모델링하는 경우, 현존하는 과거의 흔적은 집단 사회 의지에 따라 보존 여부가 결정된다.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는 어울리지 않는 음의 집합체로 불안정했지만, 시간이 흘러 음은 다듬어졌고 조화되어 음악을 만들었다. 긴 시간 속 적막을 깨고 나온 공간은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아프고 치욕스러운 과거를 보여주는 시대의 흔적이라도 보존하고 남겨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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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 원오원아키텍츠 ( @oneoone.archive )
사진, 글 : 신효근 ( @_hyogeu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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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_경험을_주는_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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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경궁로35길 63
매일 09:30 - 17:30 (매주 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