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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geun Oct 20. 2023

“틈으로 새어 나오는 진실”

노량진 지하배수로

“틈으로 새어 나오는 진실” - 노량진 지하배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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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문화 태동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원활한 식수 공급과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 때문에, 인류 최초 문명은 강을 끼며 번성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상수도 공급과 더불어 배수시설 또한 중요해진다. 19세기 산업화 시대, 강을 끼고 번성하던 유럽의 도시들은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의 쓰나미를 온몸으로 받는다. 인구 과밀에 대응하지 못한 도시 인프라는 오수가 하천으로 방류되면서 식수, 용수를 오염시켰다. 배수시설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조선도 그 피해를 막지 못했다.


배수시설은 단순히 상수도와 하수도를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 적절한 용량의 배수로를 설치하고, 장마에 대비하여 단시간에 많은 용량의 우수를 배출하기 위해 배수로 입구의 위치와 경사도를 설정하는 것이 관건이다. 치밀한 설계와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노량진 지하배수로’는 도시의 오하수와 우수를 배출하는 배수로로서, 노량진로 지하에 매설되어 있다. 총 5구간으로 나뉘는 밀폐형 인공 수로인 하수 암거 중, 1899년에 만들어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말굽형 배수로도 있다. 구간 모두 축조 시기와 공법이 달라 토목과 수자원 기반 시설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노량진역 7번 출구로 나와 걷다 보면, 삼각형, 사각형 덩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는 엘리베이터가, 다른 하나는 전시장으로 사용되며, 입구 대신 유리 난간만 설치되어 있다. 후자는 지하 깊숙한 곳까지 바람과 빛을 들이는 우물과 같다. 그 둘 사이, 땅을 가른 틈 사이로 계단실이 있으며, 반층 내려가면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우리를 근대 역사 속으로 안내한다. 빛은 천장과 벽이 일체화된 곡면을 타고 떨어져 공간을 성스럽게 하고, 습기 찬 내음은 하수 암거 공간에 무게감을 준다.


전시실은 안정적인 구조를 위해 천장에 헌치(haunch)를 시공한 사각형 구조의 1구간부터, 말굽형 석축 및 벽돌 구조로 대한제국 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배수로인 2구간, 헌치를 시공하지 않은 3구간, 거푸집 이음부가 매끄럽게 처리되어 정교한 시공성을 보여주는 4구간, 바닥과 천장 모두 헌치가 시공된 5구간으로 구성된다. 해당 구간들 말고도 서울시 곳곳에 20세기 초 근대 하수시설이 발견되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건 노량진 지하배수로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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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공간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건, 당시 토목 기술과 함께 도시 역사와 맞물린 기반 시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배수로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위생과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시설임에도, 해당 시설은 지어지는 즉시 묻혀 사라져 버린다. 우리네 시간과 궤를 같이함에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은 어쩌면 배수로라는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로 역사에서도 사라져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물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물은 마을 형성의 발판이 되었기에 마을 신앙의 모태가 된다. 용왕의 보금자리로 전해 내려오거나 시공간을 잇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기능을 다해 우리에게 등장한 배수로는 여전히 땅속에 묻혀 신성한 이미지를 가진다. 솟아오른 삼각형, 사각형 매스와 갈라진 틈 사이로 도시의 전설이 새어 나오는 모습. 반 층 아래 위치한 전시장 천장에 뚫린 동그란 창을 통해 이러한 생각이 마침표를 찍었다. 마을을 형성하게 해준 우물처럼, 도시가 번성할 수 있게 해준 ‘노량진 지하배수로’는 전설의 진실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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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최춘웅 ( @choonmure )

사진, 글 : 신효근 ( @_hyogeu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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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_경험을_주는_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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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40-90 (노량진역 7번 출구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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