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한 개의 여유

서울야외도서관 사업

by hyogeun

한국은 배달 선진국이다. 특히 서울은 익일 배송을 넘어 당일 배송이 당연시되고 있다. 아침에 주문하면 퇴근 후 받아볼 수 있는 편리함은 고객 수요를 증가시켰고 기업은 앞다퉈 신속 정확한 배송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빨리빨리 민족에게 가속도가 붙은 현 상황은 문화 정체성 강화보다 삶의 침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회학자 정승복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도시민의 ‘여유 없음’이라 말한다(1).


여유는 느림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느림은 공간의 비움에서 비롯된다. 여유로운 도시는 속도를 늦추고 누구나 정주할 수 있는 ‘오픈 스페이스’가 많은 공간이다. 파리가 낭만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는 거리의 통일성, 어디서나 보이는 에펠탑, 켜켜이 쌓인 도시의 역사만이 아니다. 조금만 걸으면 끊임없이 마주치는 열린 공간이 삶의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이 열린 공간은 단지 열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공간만큼 거리, 공원, 빈 광장에 의자가 수도 없이 많다. 덩굴 속 숨은 벤치부터 공원을 둘러싼 의자들, 심지어 테이블까지!

도시를 거닐면 크고 작은 공원을 자주 만나게 된디. 여기는 튈르리 정원이다.

시간과 금전의 제약이 따르는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보다, 의자 한 개의 여유가 도시의 기억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런 기억이 쌓일 때 사람들은 도시에 애정을 품고, 과거를 존중하며 보존하려는 의지를 갖는다. 낭만의 도시는 결국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조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열린 공간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익숙함 때문만은 아니다. 머무는 공간보다 지나가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빠름과 효율을 중시하는 도시에서 의자는 때로 거리의 장애물처럼 여겨진다. 설치하더라도 노숙인의 장기 점유 우려와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설치를 기피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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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울 도심 속에서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서울야외도서관’은 작지만 주목할 만하다. 서울시는 서울광장, 청계천, 광화문 광장에 의자와 책을 비치해 놓으면서 세계 최초의 아웃도어 라이브러리라 홍보한다. 하지만 사업이 도시에서 효과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열린 공간을 ’정주 공간‘으로 전환했다는 데 있다.


서울광장은 넓지만 자리가 없고, 청계천 또한 산책로이지 정주 공간이 아니다. 시각적인 여유만을 줄 뿐이어서 쉬려면 카페로 들어가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야외도서관은 그곳에 의자를 놓고, 주제별로 책을 담은 책 바구니를 놓거나 책 부스를 설치했다. 광화문 광장은 이미 개선 사업을 거쳐 크고 작은 벤치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야외도서관은 한발 더 나아가 경복궁의 광화문을 배경으로 좌석을 배치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게다가 밤에는 영화관으로 변신해 낮과 밤, 삶을 풍족하게 채워준다.

왼쪽부터 서울 광장, 청계천, 광화문 광장

실제로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책을 읽기보다, 낮잠을 자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평소 보지 못했던 하늘과 도시 풍경을 관찰하기에 바빴다. 독서가 하나의 트랜드가 된 시대에 책은 SNS 인증 소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시민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였던 건 단순한 의자 한 개가 분명했다.

책도 읽지만, 풍경을 감상하고, 도란도란 수다도 떠는 사람들

야외 도서관의 활동 영역이 넓어져 그 매력을 더 많은 이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도시 곳곳에 여유를 가져다줄 의자 한 개를 바라는 시민이 많아진다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빠르게 지나쳐 잊혀지는 도시가 아니라 천천히 머무르다 가고 싶은 낭만적인 도시로 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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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글 : 신효근 ( @_hyogeun_ )

(1) : 정수복,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문학동네, 2015

(2) : 온수진, 2050년 공원을 상상하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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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_경험을_주는_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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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광화문 광장, 청계광장 일대, 서울광장

기간 : 25.04.23 - 6.29 / 25.09.05 - 25.11.02 (매주 금, 토, 일)

시간 : 6월 29일까지 : 16:00 - 22:00 / 이후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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