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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흔적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영동 대공분실과 민주화운동기념관

by hyogeun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승강장에서 철도 건너편 검은 벽돌 건물에 시선이 머뭅니다. 번쩍이는 고층 건물 사이 혼자서 어떠한 사연을 갖고 있는 듯 보였거든요.


남영동 대공분실을 아시나요? 간첩을 잡아 취조한다는 명목으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76년 착공 이후 1983년 2개 층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7층 건물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곳이 간첩 조사실이 아니라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연행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죠(1). 1985년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에 대한 고문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00 해양연구소'로 위장한 본 건물의 실채가 드러납니다(2). 그리고 현재 이곳은 설계 공모를 거쳐 대공분실 리모델링, 민주화운동기념관 증축과 함께 6월 10일 개방되었습니다. 38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과 함께 말이죠.


풀려난 그날의 기억이 어떻게 하면 흔적으로만 남지 않을까요? 몸에 난 상처를 보면 치료 방법과 재발 방지법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흉터는 아니죠. 지나간 과거로서 완결된 느낌이 강하고 왜 다쳤는지만 떠오릅니다. 흔적은 회상 장치일 뿐, 그다음을 생각하게 하지 않죠. 현재까지도 조작된 사건의 진상규명이 필요하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은 오늘날에도 지속되어오고 있어요. 역사로만 남게 된다면 '인권 유린의 대표적인 사건', '한국 1세대 건축가의 악랄함'만 회자될 것이고, 민주주의는 꾸준히 '지켜내야 하는' 진행형이 아니라 '지켜진 것'으로 과거에 머물게 됩니다. 풀려난 그날의 기억을 담는 전시와 기념관은 끊임없이 관객이 질문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때론 질문을 던져 미래를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고의 깊이와 확장을 촉구해야 하죠.


민주화 운동기념관은 그런 면에서 성공했다고 봅니다. 이곳은 크게 5군데로 나뉘는데, 남영동 대공분실의 후신 M2, 그것과 마주 보는 신축 건물인 교육동, 그 둘 사이에 위치한 민주광장, 광장의 서쪽으로 치유의 길, 동쪽으로 지상 1층, 지하 2층 규모의 기념관 M1이 자리합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효과는 약하지만, 기념관이 제시한 관람 동선(M1-M2-치유의 길-교육동 내 민주마루)을 따라 감상한다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주주의 개념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건을 관객에게 들려주고 이해시키는 건 꽤 어렵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 수 있으면서도 끝까지 집중하게 하는 기승전결이 필요하죠. 이를 건축에서는 순차적 구성, '시퀀스(Sequence)'라고 합니다. 그럼 좀 더 공간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민주화 운동기념관 정문과 외관 / 사진 : 신효근

M1 - 민주화 운동과 민주주의

안내 데스크가 있는 M1 정문을 지나 경사로를 타고 지하로 내려갑니다. 지하 1층에는 두 개의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먼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국 민주화 운동 1,2> 섹션으로 이동해 봅니다. 1에서는 국가 법정 기념일을 포함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과 시행령에서 정한 11개의 민주화 운동사를 다루고, 2에서는 학생, 재야/종교/국제연대, 노동, 농민/빈민, 언론/교육/문화, 여성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중심인 민주화 운동사를 다룹니다. 둘 사이에는 오픈 아카이브 창이 있는데, 수장고에 보관된 90만 건의 민주화 운동 사료의 일부를 보여줘 글이 위주인 전시를 환기하도록 돕죠.

M1 지하로 내려가다 뒤를 돌아본 모습, M1과 M2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 사진 : 신효근

지하 2층은 벽을 따라 설치된 30개의 터치형 모니터를 통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담긴 장소, 사물, 노래에 관한 영상을 보여주는 <민주의 기억>이, 그 중앙 홀에서는 일상 속 민주화를 그려낸 특별 전시 <민주주의, 내일을 꿈꾸다>가 진행 중입니다.

다각도로 바라본 M1 전시장 / 사진 : 신효근

다시 경사로를 따라 지하 1층으로 올라오면 두 번째 전시인 <민주의 어제 그리고 내일>에서 20세기를 살아온 역사적 인물의 발언을 통해 민주주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탐구하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며 답을 고민합니다.


M1은 한국 민주화 운동 역사에 대해 관객을 이해시키고,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마지막은 검은 벽돌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끝납니다. 민주화 운동 사망자로 인정된 136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억의 벽>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400여 명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기억의 통로>를 통해 앞으로의 전시와 공간을 암시하죠.

<기억의 벽>과 <기억의 통로>, 사진 : 신효근

M2 - 그날의 기억으로

M2는 M1과 달리 예약자만 입장 가능합니다. 전시 중 일부가 13세 미만 어린이의 관람을 제한하기도 하고, 보존해야 할 사료가 많기 때문이죠. 관람 예약은 아래 링크에서.

남영역에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곳으로 들어갑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건물은 증축을 거쳐 7층이지만, 전시는 5층까지만 진행됩니다. 5층을 제외한 공간들은 전부 어둡습니다. 마치 검은 벽돌처럼요.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정적도 잠시, 나무 탁자 위 오래된 전화기가 울립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소음 같은 수화기를 들어야만 끝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죠. 화면 속 한 남성이 걸어 들어와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는 <그날의 기억>으로 시간 이동을 합니다.

사진 : 신효근

일부 기념관에서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 밀랍 인형을 사용하곤 합니다. 당시 상황과 피해자의 고통을 리얼하게 보여주어 관객이 전시에 집중하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로 '리얼'하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 방식은 관객의 상상을 도리어 멈추게 합니다. M2는 디지털 영상을 통해 당시 상황을 비춰줍니다. 오롯이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상상이 필요 없는 순간에만 영상 매체를 활용하죠. 관객의 상상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고문 기구, 공간, 그리고 소리를 통해 발현됩니다.


특히 소리는 M2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사운드 스케이프(Sound Scape), 음환경 디자인을 통해 204개의 스피커에서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도록 돕습니다. 두꺼운 정문의 철문이 열리고, 정문에서 보이지 않는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벽 끝의 좁은 문을 통해 피해자가 연행됩니다. 문 바로 옆, 5층으로만 연결된 철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조사실로 오릅니다. 그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소리가 1층에 울려 퍼집니다. 그것도 풍성(?) 하게 말이죠. 그 밖에도 각 층에는 당시 송출된 조작된 사건을 다루는 뉴스 보도, 괘종시계,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대공분실 앞 테니스장의 소리, 고문자의 발언과 물소리, 피해자의 증언을 들려주죠. 그래서 관람객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집중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시선으로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피해자의 불안함과 고통을 느끼고, 가해자의 파렴치한 인강성 말살에 치를 떨게 되죠. 끝내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왼쪽부터 정문의 철문, 건물 후면 연행자 출입구, 나선형 철제 계단 / 사진 : 신효근

저는 피해자에게만 집중한 전시보다 관객이 자발적으로 가해자의 입장도 되어보는 전시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쪽으로 기울어진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 거기서 사고가 멈추어 일종의 배타주의와 적대주의만 부추기게"(3) 될 것이기 때문이죠. 가해자의 행위에 공감할 이유는 없겠습니다만, 그 입장이 되어 '나라면 저들과 똑같이 했을까?', '무엇이 저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 '저들의 행동을 막을 방법은 뭐였을까?'를 질문하며 앞으로 저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끔 법과 제도, 생각을 고쳐나가야 하겠죠. 그게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요.


4층까지 어둠과 소리, 영상, 도면이 관람객을 집중시켰다면, 5층 조사실은 오롯이 실재만을 보여줍니다.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운영된 각 기관의 조사실 중 유일하게 현장 보존된 곳이기 때문이죠. 밝은 복도, 엇갈려 배치된 15개의 조사실, 꽃이 놓여있는 박종철 조사실, 조사실 내 고문 욕조와 변기, 쾌쾌한 냄새. 전시장은 정적이 감돌고 우리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왼쪽부터 5층 복도, 박종철 조사실, 또 다른 조사실의 모습 / 사진 : 신효근

치유의 길 - 환기

M2에서 전시가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면, 끔찍하고 애통한 잔상이 전시 과정에서 떠올랐던 생각들을 잠식해 버릴 것입니다. 민주 광장과 그 옆 치유의 길이 잠시 우리를 환기시켜 줍니다. 민주 광장은 본래 간부들의 테니스 장이었습니다. 테니스 코트 위치를 그대로 표기하고 일부는 바닥을 덜어내 M1 지하 전시실로 빛을 들이죠. 치유의 길은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외관 특징인 좁고 긴 수직 창의 모습을 적용하여 기존 대공 분실과의 연결성을 주면서도 그 틈사이로 민주화운동 기념관과 민주 광장을 비춰줍니다.

좌 - 치유의 길, 우 - 교육동 앞 민주광장 / 사진 : 신효근

교육동 내 민주마루 -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동은 대공분실과 달리 밝은 외장재로 치장되어 있죠. 그 둘이 서로 마주 보는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대공분실에서의 침울함이 이곳에서 정화될 것만 같죠. 민주마루는 교육동 내 4층에 위치합니다. 민주마루는 열람실이자 전망대로 남영동대공분실 초기 도면, 사진집부터 민주주의와 관련된 책들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람실 밖 민주 마루에서 대공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게 큰 특징이죠.


과거 건물은 층수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설비 시스템의 수가 많지도 크기가 크지도 않았죠. 전기 배선, 수로 배관, 에어컨 설비가 대부분 천장 마감 위에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의 높이보다 적게는 1/3, 많게는 1/1 높이가 천장 속에 숨어있지요. 그래서 오늘날의 건물 한 층의 높이는 과거보다 높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4층 민주마루에서 건너편 대공분실을 바라보면, 대공분실의 5층과 눈높이가 맞습니다. 동등한 위치에 서서 권위에 눌리지 않고 그날의 기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민주주의 말살 장소가 민주주의의 상징의 장소가 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죠.

민주마루에서 바라본 남영동 대공분실 / 사진 : 신효근

결국 일련의 과정이 민주 마루에서 대공분실을 보기 위해 거쳐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그날의 기억을 소환해 우리가 오늘날 어떠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며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하는 공간, 그런 공간이 결국 풀려난 기억을 흔적으로만 남지 않게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제는 대공분실보다 주변이 눈에 들어옵니다. 계단에서 두 명의 소녀가 앉아 있는 모습, 광장을 뛰노는 아이, 두 손 꼭 잡고 기념관을 지나는 연인, 가족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자유와 평등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음을, 지속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임을 상기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 건축가 김수근

대공분실 리모델링 및 M2, 교육동 증축 : 디아건축사사무소

사진, 글 : 신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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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화운동기념관 M2 2층의 <조작된 장면> 설명글, 독재정권에 충성하는 부역자들은 대공수사 전담 조직을 꾸려 무분별한 성과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잡은 간첩'보다 '만들어 낸 간첩'이 더욱 많았다.

(2)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1049442

(3)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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