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나를 태우는 방법

타비스트 카이호로 오타루

by hyogeun

당일치기 관광객이 밤사이 빠져나가 헐거워진 아침 거리는 이방인이 지역민의 삶에 스며들 여지를 준다. 빙판길에 놓인 생선 박스 타워를 조심스레 옮기는 직원부터, 종종걸음으로 시바견과 산책하는 견주, 그들보다 먼저 눈을 치우던 집주인과 카페 간판을 내놓으며 하루를 여는 사장님까지. 나의 시간은 잠시 멈춰 서 있는데, 그들의 시간은 분주히 흐른다. 그 속도에 몸을 실어 현지인의 일상에 나의 시간을 슬쩍 태워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토록 한갖진 순간 덕분에 백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오타루의 전성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일정에 쫓겨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도시의 면면과 그 시간을 간직한 건물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물렀던 숙소의 역사를 되짚어 보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항구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타비스트 카이호로 오타루(Tabist Kaihoro Otaru, Tabist 海宝樓 小樽)’가 있다. 직역하면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바다 위 보물 같은 집’. 일본어로 여행을 뜻하는 타비(旅, Tabi)에 ‘-ist(-하는 사람)’을 붙이고 바다(海), 보물(宝), 다락집(樓)을 이어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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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타비스트 카이호로 오타루 전경 (우) 철거 전 이타야 저택 전경(https://www.otaru-journal.com)

본래 이타야 저택이었다. 이타야 미야키치는 해운업을 가업으로 삼았다. 현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서 1927년 지금의 언덕에 건물을 지어 올린 것이다. 오타루항이 무역항으로 개항한 이래 동해를 떠다니는 선박부터 항구 가까이 자리한 곡물 창고 사일로, 오르골당, 운하가 들어서고 만들어내는 다층의 이야기가 저택에 모두 담긴 것이다.

IMG_6204.jpg 오타루 메인 관광거리와 바로 이어지는 숙소 앞 언덕길. 동해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가치를 인정받은 저택은 오타루시 지정 역사적 건조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옥색 지붕 아래 일본식 전통 목조 건물이 ‘ㄷ’ 자로 배치되고 획 끝에 각각 석조 서양관과 창고가 붙는다. 다만 현재는 대문만 남고 담장은 헐렸으며 입구와 가까운 서양관과 이어지는 ‘ㅡ’자 획만 남겨두고 이것과 창고와 이어지는 ‘ㄱ’자 목조 건물은 헐렸다. 대문 바로 옆 연못을 매립한 자리에 주차장과 4층 규모의 콘크리트 신관을 확장하여 이방인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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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한껏 머금은 뒤틀린 미닫이문을 있는 힘껏 민다. 어두운 로비에 난로와 조명이 간신히 내부를 비추고 바닥에 깔린 나무 조각 일부는 자리를 벗어나 있다. 다다미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눌리고 다듬어져 매끈하다. 이타야 가문의 거실이었을 마루가 이제는 리셉션이 되었고 오른쪽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서양관은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니 액자에 걸린 크고 긴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상인의 길

상인은 모험을 바라야 한다. (중략). 내가 걷는 곳 그 자체가 길이다. 남의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상인의 길이다.


상인의 덕목을 규정한 훈시이지만, 이는 곧 여행의 또 다른 말인 것 같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도시를 즐기라는 100년도 지난 어르신의 훈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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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로 바뀐 목조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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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리셉션에서 서양관으로 향하는 통로 (우) 레스토랑으로 변한 서양관

마루를 지나 신관과 이어지는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 객실로 들어선다. 완전한 현대식 건물이지만, 나무 바닥은 목조 건물의 그것과 그대로 이어진다. 객실 내부에 창가 한쪽에 마련된 난로도 로비의 그것과 같다. 시간여행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레 객실까지 당도한다. 4층에는 대욕장이 있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오타루와 그것을 내려다보는 이타야 저택을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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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위상을 보여주지만 이제는 박물관의 비석으로 전락해 버린 대문에 불이 들어오고 신관 아래로 물이 차오르며 기모노를 입은 직원들이 이곳저곳을 배회할 것만 같다. 오타루 운하에 배가 정박하고 운하에 줄지어 늘어선 창고로 물자를 바삐 옮기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여행의 맛을 끌어 올리는 건 이처럼 시공간이 교차하는 공간에 나를 태워 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곧 다시 밀려오는 관광객들이 현재로 나를 끌어당기겠지만, 개의치 않고 세월을 머금은 나무 내음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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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신효근 ( @_hyogeu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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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_경험을_주는_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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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훗카이도 047-0027, 오타루, 시노노메초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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