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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6. 2021

전쟁을 대하는 일곱 가지 방법

서양 근현대 미술에 나타난 전쟁과 미술

프란시스코 고야, <개>, 1819 - 1823년


전쟁은 인간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은 저마다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살길을 모색한다. 이러한 선택은 때로는 신념을 지키는 고귀함으로 불려지기도, 침략국의 논리에 동조하는 배반 행위로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스페인에서 궁정화가로서 승승장구했던 한 화가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후일 스페인의 보물이라 불리는 수많은 작품들을 그렸던 프란시스코 고야(1746 ~ 1828)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생전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았고 노년 시절을 제외하면 이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반도 전쟁이라 불리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터지자 이 위대한 화가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는 전쟁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야 하면 <1808년 5월 3일>을 떠올린다. 때문에 그에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기록상으로 보았을 때 차라리 기회주의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실상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그는 프랑스가 옹립한 호세 1세가 통치했을 시절에는 호세 1세의 그림을 그렸으며 이후 영국군이 들어와 스페인이 영국의 영향을 받자 제작 중에 있던 호세 1세의 초상을 웰링턴 공작의 얼굴로 바꾸어 그리기도 했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가 깔린 그림으로 알고 있는 <1808년 5월 3일>도 화가가 친프랑스 행위로 의심을 받을 때 그렸던 것이라 그 목적에 있어서 일종의 "면죄부"와 같은 성격이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가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지배자의 녹을 받아먹고사는 궁정 화가 고야는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19세기의 거장이 아닌 그저 일개 화가였을 뿐이다. 혹자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술사의 역사를 보았을 때 슬프게도 붓은 칼보다 강하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얄팍한 기회주의(그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지배자의 세력에 따라 그것에 동조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심지어 그는 종교재판소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를 동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텍스트로서 고야의 행적을 바라보기보다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고야를 보노라면 측은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그가 말년에 그린 개의 모습처럼 말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1800년


 똑같은 시대 또 한 사람의 화가가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다. 고야가 전쟁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이 화가는 전쟁,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유를 위한 혁명을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고야와 마찬가지로 이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 ~ 1825)는 당대에 인정받는 화가였고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와 나폴레옹 집권기에는 그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흔히 신고전주의라 불리는 그의 화풍은 18 ~ 19세기를 대표하는 화풍 중 하나가 되었고 그 영향력은 앵그르(1780 ~ 1867) 사후 샬롱으로 대표되는 주류 미술에까지 이어졌다.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의 경우가 국가의 영광, 민중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또 그는 평범하게 묘사할 수도 있는 사건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처럼 이상적인 형상으로 재현해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또한 이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선으로 구성된 구도는 인물의 역동성을 배가시켜주며 붉은 망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열정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다비드의 주제가 아니었다. 사실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희생당하는 피해자로서의 민중은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무시되고는 했다. 다비드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고전적인 이상에는 혁명을 위해 한 목숨 바치는 병사의 용감한 돌격만이 어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쓰러지고 부상당해 고통받는 병사들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그러나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전쟁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 화가도 있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오귀스트 르느와르(1841 ~ 1919)가 그린 이 작품을 보았을 때 19세기 후반의 파리는 그야말로 축제와 기쁨이 공존하는 장소다. 사람들은 샹들리에 불빛을 조명 삼아 무도회를 즐기고 있고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밝은 색점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19세기 도시 생활의 낭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1876년은 자연스레 5년 전의 끔찍한 기억.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을 떠올리게 한다. 불과 5년 전 파리는 좌파 세력이 도시를 장악해 코뮌을 세웠다. 보불전쟁의 치욕적인 패배와 그로 인한 경제 붕괴가 파리에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르느와르는 이 시기 첩자로 몰려 처형당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오래가지 못했고 4만 명의 사망자만을 남겨둔 채 끝나게 된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치른 다음 그가 했던 선택은 '망각'이었다. 그의 회화에는 그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은 어디에도 없다. 마치 현실 도피를 위해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사람처럼 그는 유난히 밝은 색채의 화려한 도시를 자주 그렸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르느와르 혼자만 선택한 길은 아니다.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네, 피사로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불전쟁 기간 동안 영국으로 도피해 살았고 잘 알고 있듯이 전쟁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상을 그렸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기억해내려 하지 않았던 그날의 참상은 유난히도 밝은 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속에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도 짙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스타브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년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이 시대를 휩쓸었던 동시대 인상주의자들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 화가가 있다. 그는 파리 코뮌 당시 미술인 동맹 대표로서 루브르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사상적으로도 그들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1819 ~ 1877)는 이처럼 인상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어찌 보면 그는 전쟁에 대해서 다비드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비드가 국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쿠르베는 좀 더 민중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그것은 쿠르베가 추구했던 미술 사조에서도 나타나는데 사실주의라는 것 또한 작품의 대상이 농민, 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란 단순히 외양적으로 똑같이 그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주의자들은 사회의 하층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리고 그들이 처한 "진실"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의 그림은 노동을 이상화시키고 숭고한 행위로 묘사하는 고전적인 회화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실주의 회화는 말 그대로 노동자. 항상 일에 치여 살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며 자식들까지 노동의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 하층민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회화 경향은 왜 그가 파리코뮌에 동조했는지를 말해준다. 특히 쿠르베가 파리 코뮌 이전에도 서슴없이 정치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선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있다. 특히 이런 선택은 그 어떤 경우보다 혹독한 대가가 필요하다. 특히 쿠르베의 경우 그 대가의 정도가 심했다.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그는 체포되어 자신이 그린 모든 그림과 재산이 압수당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쿠르베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고 4년 뒤에 사망했다. 그가 다시 프랑스 땅을 밣은 것은 그가 죽은 지 40여 년 뒤인 1919년이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창기병들의 돌진>, 1915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으로부터 다시 한 세대가 지났다. 20세기의 유럽은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 번영을 구가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은 신을 믿었던 중세인들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절대 신과 같이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철도과 각종 운송수단의 발달로 도시 간의 상대적 거리는 그전과는 다르게 놀랄 정도로 좁혀졌고 통신수단은 놀랄 만큼 발전하여 이제는 굳이 파발을 띄워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의 진보의 믿었던 이 시대 사람들은 그 진보의 근원을 과학기술에 있다고 보았다. 소위 미래주의라고 불리는 문화 사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들은 철도가 이루어낸 속도를 동경했고 고전 회화보다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기계문명을 동경했으며 그것이 인류 역사의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살의를 드러냈을 때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그러자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린다. 미래주의자들은 전쟁마저 동조했다.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미래주의에서 전쟁에 대한 동조는 필연적이었다. 기술이 집약된 무기들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미학"의 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일 그들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상중 하나인 파시스트를 옹호하는 방향으로까지 흘러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이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적 조류에서 뻗어 나온 사상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런 선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위 그림을 그린 미래주의자 움베르토 보치오니(1882 ~ 1916)는 무솔리니에 동조했던 마리네티와 같은 예술가들보다는 비난을 덜 받은 편이었다. 그는 이미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전쟁터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


먼 길을 돌아 다시 스페인. 그곳에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 ~ 1973)가 있다. 하지만 고야의 시대처럼 당대의 스페인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내전이란 악마는 나치와 코민테른이란 무기를 들고 전 국토를 유린했다. 1937년 4월 6일의 참상을 그린 이 작품에는 어디 하나 뚜렷한 형상이 없다. 이 그림에는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전쟁의 참혹성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저 맨 오른쪽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만 보아도 충분하다. 당시 게르니카 사람들은 우측의 인물처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구원해줄 신을 목놓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도해 마지않았던 하늘은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일 뿐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어떠한 색깔을 쓰지 않은 채 흑백의 음영으로 처리했다. 그 보다 더 이 광경을 묘사할 색깔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그림은 그가 직접 게르니카를 방문하고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본 사진이 현장의 참혹함을 경감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카소는 그가 그린 여러 실험적인 그림만큼이나 정치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실제로 1944년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정치적인 그림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양은 아니었다. 그가 그린 정치적 그림은 다름 아닌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표작 <게르니카>이외에도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전쟁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기 작품에서는 그런 점이 더 드러난다. 그는 전쟁을 회피하지도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고민했다. 바로 붓을 통해서 말이다.


케테 콜비츠, <빵을!>, 1924년


여기 전쟁을 대하는 마지막 사람이 있다. 바로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1867 ~ 1945)다. 그녀는 표현주의 화가로서 생애 대부분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냈다. 위에서 이야기한 6명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가 전쟁을 대하는 방법은 자못 비극적이라고 할만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화가의 그림이라기보다는 불행한 시대를 견뎌야 했던 모든 어머니들의 초상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민중미술을 추구했던 그녀가 그렸던 대상은 주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이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전쟁은 테크놀로지를 찬양한 미래주의자의 장밋빛 전쟁도, 사진으로 게르니카의 참상을 접한 피카소의 흑백 전쟁도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전쟁은 그저 참혹한 현실 그 자체이며 그 달리 설명한 도리가 없었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다리를 잃고 돌아온 아들이 그가 목격한 전쟁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생애 대부분 보아야 했던 사회의 현실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전쟁을 반대하며 살았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1차 세계대전 때는 아들을, 2차 세계 대전 때는 손자를 잃었다. 히틀러의 집권기에는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다. 전쟁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상당수의 작품이 화마에 소실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전쟁의 반대는 전쟁과 평화라는 관용구로 이어지는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쟁의 반대는 생존이었고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그녀의 편은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끝내 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 사망했다. 후일 그녀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여류 화가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그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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