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론서들을 통해 보는 시기 구분과 서술방식의 변화
학부 시절 서양 근대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근대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근대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것의 시작과 끝은 언제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수업 시간 중에 간접적으로 밝혀지지만 거장들의 대표작과 ism들의 물결, 과제 폭탄과 B4 사이즈 시험지를 채워야 한다는 상황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았다. 서양 근대미술에서 근대는 무엇일까? 사실 누군가에겐 이런 질문 자체가 오늘날의 문제의식과 동떨어진 무엇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때를 풍미했던 시대구분론은 오늘날 학계에서 더 이상 새로운 연구 영역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시대구분론이 사실상 결론이 없는 주장들의 무한 반복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시대를 인위적으로 나눈다는 것이 과연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인가에 대한 회의가 학계 내에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시대구분론은 특정 시기를 거시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속성들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성과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학계의 합의는 논쟁의 과실은 취하되 각 시대를 특정 시간대로 고정하지는 않는 정도의 선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 배움의 단계에서 특정 시대에 대한 모호한 규정은 큰 혼란을 낳는다. 많은 수업들이 인과의 사슬 중 어느 지점을 끊어 근대라는 틀을 소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런 범주화를 시도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학부 과정에서 서양 근대미술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18세기 말 신고전주의부터 시작해서 후기인상주의, 세잔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순차적으로 배우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왜 근대 미술을 배우는데 18세기 말, 심지어는 18세기 중반의 미술 경향부터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근대 미술의 끝을 1900년이 아닌 1880-90년 언저리 혹은 1914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로 설정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이와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난관이 하나 있다. 어떤 키워드로 글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이나 역사학의 경우 80-90년대를 전후로 시대구분론에 관한 논문들이 많이 나왔기에 어렵지 않게 논쟁의 얼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양 근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으로 19세기 미술을 다루는 교과서적인 텍스트들을 살펴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해당 책들이 어디서부터 근대 미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또 어떤 관점에서 그것들을 다루는지 살펴보면 서양미술에서 근대라는 것의 얼개를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미권에서 사용하는 19세기 미술에 관한 책은 크게 4가지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책은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과 호르스트 잰슨(Horst Waldemar Janson, 잰슨 서양 미술사의 저자이기도 하다)의 『19th-Century Art』로 1984년 초판 출간 이후 2004년 2판까지 나온 상태다. 두 번째는 스티븐 아이젠만(Stephen F. Eisenman) 외 5명이 공저한 『Nineteenth Century art a Critical History』로 1994년 첫 출간 이후 2019년 5판이 출간되었다. 세 번째는 페트라 추(Petra ten-Doesschate Chu)의 『Nineteenth Century European Art』로 2006년 초판 출간 이후 2012년 3판까지 출간되고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마지막으로 미셸 파코스(Michelle Facos)의 『An Introduction to Nineteenth Century Art』로 2011년 초판이 출간된 책이다.
각각의 책들은 19세기 미술을 입문하기 위해 적어도 한 번은 살펴보는 책들로 오늘날 한국의 서양 근대미술사 관련 수업의 실라버스에도 빈번하게 올라온다. 하지만 막상 각각의 책들을 비교해보니 하나의 개론서로 묶기에는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었고 바로 이러한 차이가 근대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특히 책의 구성뿐만 아니라 무엇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는지, 책의 시작과 끝을 무엇으로 잡는지 등 세부적인 사항들에서 저자들의 근대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여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전문연구자가 아닌 교양 독자의 입장에서도 꽤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평소 미술에서 근대란 무엇이고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제시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개론서에 대한 분석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살펴볼 로젠블럼과 잰슨의 책은 서장부터 기존 미술사 서술과의 분명한 차별점을 강조한다. 로젠블럼은 이 책이 20세기의 관점에서 설정한 "19세기 명예의 전당"을 다시금 바라보고 19세기를 그 세대의 고유한 논리로 바라보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은 책 출간 당시 근대미술을 서술하던 지배적 경향이자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부 수업에서 택하고 있는 프랑스 중심적, 회화 중심적 미술사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이러한 미술사에서 근대미술의 역사는 프랑스 회화의 전개 과정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신고전주의의 출현,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경향과 이후 벌어지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 경향,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근대미술의 주류는 프랑스 회화로 설정된다. 이러한 방향성 하에서 스페인의 고야, 영국의 풍경화들이나 라파엘전파, 독일 낭만주의 등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동시대의 프랑스 미술사조와 비교할 때 아주 작은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 저자는 근대 미술사 서술에 있어 그것이 역사학적인 시대 구분과 분명한 차별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때 로젠블럼과 잰슨이 염두하고 있는 관점은 장기 19세기로 근대를 보는 관점으로 추정된다. 역사학 분야의 시기 구분 중 근대를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까지로 보는 관점은 오랫동안 근대를 구분하는 주된 척도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장기 19세기로 근대를 파악하는 관점은 1927년 아서 제임스 그랜트(A.J. Grant)와 해롤드 템퍼리(Harold Temperley)의 저서에서 제시된 이후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19세기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역사학의 시대 구분과 미술사의 시대 구분은 많은 부분에 있어 일치하지 않았다.
로젠블럼, 잰슨의 책은 세 가지 측면에 걸쳐 기존의 시대 구분 방식에 도전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책의 구성 방식이다. 두 저자는 19세기 100년을 크게 4개의 시대로 설정하고 각 시대별로 회화와 조각의 역사를 따로 서술하고 있다. 이 중에서 조각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오늘날까지도 낯선 19세기 조각의 양상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시대의 예술 경향 중 어떠한 측면과 맞닿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해당 시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한다. 이어서 책 1장을 보면 독자는 1776년부터 1815년이라는 모호한 시대 구분과 함께 조슈아 레이놀즈의 작품 <오마이 Omai>(1776)를 만나게 된다. 저자는 1776년이 대서양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라는 점을 언급하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성경, 역사, 신화로 점철된 역사화 장르가 고전의 옷을 입은 채 동시대의 사회 문화적 조건들과 만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레이놀즈의 작품이 18세기 대륙 탐험의 한 양상을 폴리네이시아 원주민의 초상화를 통해 제시하되 그것에 <벨베데레의 아폴론> 같은 고대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자세를 부여했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서술 방식은 신고전주의의 변화를 설명함에 있어 동시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의 반영을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과 같은 작품에서 찾는 것이 아닌 훨씬 이전의 작품들에서 찾는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점을 19세기까지만 해도 미술의 중심이 아니었던(혹은 그렇게 인식되었던) 영국 출신 작가에게 찾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서술 방식과 대립한다. 책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기존의 미술사 서술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않던 낯선 작가들의 이름을 듣게 된다. 가령 저자는 19세기 초의 사회적 혁명들을 언급하며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July 28: Liberty Leading the People>와 함께 구스타프 와페르스의 <Episode from the Belgian Revolution of 1830>를 제시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각국의 예술적을 광범위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정전과 정전이 아닌 것을 등치시키는 방식은 비중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대가들의 역사로 점철되었던 19세기 미술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저자들의 목적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로젠블럼과 잰슨의 책은 기존의 미술사 서술 방식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함으로써 19세기 미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80년대에 나온 그들의 책은 20세기의 학문적 맥락에서 19세기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여러 노력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책이다. 이처럼 로젠블럼과 잰슨의 책은 19세기 미술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 인해 이후 등장하는 책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94년 나온 아이젠만의 책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서문에서 로젠블럼과 잰슨이 기존의 서술 방식을 일신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19세기를 비판적 역사(critical history)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아이젠만이 비판적 역사를 표방했을 때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공저자들은 19세기 미술을 작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로젠블럼과 잰슨의 작업이 지나치게 작품의 형식 분석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형식 분석이라는 방법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분석을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 무엇에 대한 서술 인양 전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서술은 마치 미술작품이 마주한 다양한 사회,정치,문화적 함의를 배경 설명 정도로 최소화하고 양식 변화에만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아이젠만은 형식 분석이라는 방법을 중시하면서도 그러한 요소가 어떻게 동시대 사회와 얽히게 되는지 집중하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미술은 이전에 왕, 귀족, 교회의 주문에 묶여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던 비판 의식과 자기 성찰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시기였다. 예술가의 자기 탐구는 그러한 변화의 한 증상으로 이 과정에서 형식적인 요소는 대상에 대한 재현의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사회 변동을 주관적으로 포착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점이 과연 19세기의 미술에만 적용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인식은 공저자들이 작품 분석을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론들이 개입될 여지를 제공한다. 가령 프란세스 폴(Frances K. Pohl)이 쓴 9장 <미국에서의 흑인과 백인(Black and White in America)>은 기존의 19세기 미술 서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인종 정체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메리 카사트와 토마스 애킨스의 작품을 비교하며 19세기 후반 젠더 문제와 20세기 페미니즘 이론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이렇듯 총 21개 챕터로 구성된 각 장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전공 분야와 연관된 사회, 정치, 문화적 함의들을 작품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으며 때로는 동시대의 이론을 경유해 정전으로 여겨진 작품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기도 한다. 물론 아이젠만의 책은 이런 서술 방식으로 인해 잰슨의 책과 비교했을 때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가 꽤나 어려우며 시대 구분 방식 또한 전통적인(신고전주의부터 세잔까지) 방식을 따른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19세기 미술과 관련해 논의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80년대 이후 미술사 서술의 경향을 파악하는데 적절하다. 더구나 2019년 5판까지 출간하면서 상대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경향들을 추가하거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추가 서술했기 때문에 2004년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잰슨의 책보다는 최신의 내용을 다룬다는 장점이 있다. 만약 전통적인 서술 방식으로 19세기 미술에 대한 수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면 이 책이 해당 시기 미술에 대한 논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페트라 추의 책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책들보다 훨씬 뒤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최신 연구 성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 있으며 또한 근대 미술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 서술 방식의 장점들을 수용하면서도 각각의 저술들이 드러낸 한계들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로코코 미술로 근대 미술의 첫 포문을 여는 것은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다. 신고전주의에 대한 연구로 시작하는 일반적 전개 방식과 달리 저자는 "19세기 이전 40년간의 역사를 아는 것이 이후 미술을 아는 데 있어 중요하다"며 로코코 미술과 18세기 중반의 사회적 변화에 한 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로코코를 묘사함에 있어 프랑수와 부셰나 프라고나르와 같은 유명 작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 모리스 팔코네(Maurice Falconet)의 조각이나 공방의 도자 작품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미술사에서 회화,조각 등 순수예술로 여겨지는 분야들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판화, 도자, 공예, 건축, 사진, 포스터 등 시각문화 전반을 새롭게 조명하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다. 이전의 두 책에서 이러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로젠블럼과 잰슨의 책은 전통적 서술 방식에서 잘 조명되지 않던 조각을 본격적으로 다룰 뿐 아니라 2004년 2판에 이르러서는 사진에 대한 논의도 추가시키고 있다. 아이젠만의 책 또한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사진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를 제공하며 이것이 동시대 문화 맞닿는 맥락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적어도 두 책의 초판 발행 시점에서는 불분명하게 드러나거나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각 책에서 그것들은 독립적인 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예술 장르와 어떻게 비교 분석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매체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에 대한 종합적 서술을 시도한 저자의 책은 다른 책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정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저자의 책은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잰슨과 로젠블럼의 책이 정전과 정전 아닌 것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해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들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고 아이젠만의 책이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을 동원해 주변부 작가들을 동시대의 사회적 담론 속에 위치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들은 그것이 대가의 작품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에 있어 저자는 기존의 개론서들이 그러했듯 정전을 약화시키는 것을 넘어 그것을 해체시키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가령 책에서 앵그르는 여러 장에 걸쳐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는데 이로 인해 앵그르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어떤 특별한 화가라기보다는 사회적 상황에 따른 작가의 대응을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들 중 하나로 인식되게 만든다.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은 정전을 해체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사에서 무엇을 중요시 여겨야 하고 또 어떤 작가를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개론서의 미덕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요컨대 누군가에게 저자의 책은 지나치게 산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오늘날 미술사 연구의 경향에 더없이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00년 이후 갱신된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적극적인 반영, 각 매체를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유기적 연관관계를 가진 무엇으로 보는 서술 방식, 시각 문화 연구의 성과를 도입은 오늘날 등장하는 연구들의 맥을 짚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배우는 입장에서 이러한 점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위에 제시된 두 개의 책들보다 훨씬 쉽게 쓰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용어 설명과 역사적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저자의 저술 방식에서 빛을 발한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책은 많은 경우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Glossary로 묶어서 설명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런데 추의 책은 이러한 점을 친절하게도 본문에 자세히 설명하거나 별개의 공간을 할애해 설명한다. 특히 19세기가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시기이며(가령 프랑스혁명) 미술 용어에 있어서도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어들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측면은 책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서양 근대미술사 수업에 있어서도 이런 용어나 역사적 사실을 당연히 알거라 생각하고 혹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볼거라 생각하고 간략하게 설명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업 내용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절판되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날 19세기 미술의 연구 지형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추의 책을 일독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셸 파코스의 책은 소개한 책들 중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2010년대 이후 주목받는 여러 관점들이 책에 녹아들어가 있으며 인터넷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문장으로 책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19세기 미술에서 하나의(single) 이야기는 없다"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기존의 미술사 개론서들이 서유럽과 독일 중심의 미술사였다고 비판하면서 중부,동부 유럽 등 유럽의 주변부에 해당하는 미술들을 도외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저자가 1750년부터 1900년까지의 미술을 서술하면서 스칸디아비아, 동유럽, 러시아 등 기존의 미술사 서술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국가의 미술을 프랑스, 영국 미술들과 비교 분석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한 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은 단순히 19세기 미술에 대한 독자의 폭을 넓힌다는 측면을 넘어 프랑스, 영국 중심의 미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편견들을 교정시켜준다는 점에 있다. 가령 다비드가 그린 <생 베르나르를 넘는 나폴레옹>(1801)은 유럽의 기마 초상 전통 하에서 오스트리아 조각가 프랑츠 자우너(Franz Anton von Zauner)의 요제프2세 동상(1790-1806)과 비교되며 그것이 로마적인 외양을 갖춘 전통적인 군주상과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설명한다. 19세기 말 후기 인상주의 서술에 있어 고갱,고흐는 폴란드의 얀 마테이코(Jan Matejko), 핀란드의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와 함께 제시되며 저자가 서문에 밝힌 서양 19세기 미술의 이질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술 범위의 확대라는 측면 외에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강점은 당대 사료 활용과 부가 자료의 충실함에 있다. 앞선 책들에서 1차 텍스트가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매 챕터마다 꼼꼼하게 1차 텍스트를 포함시킨 책은 파코스의 책이 유일하다. 더구나 이러한 1차 사료 독해가 출판사가 제공하는 보조 사이트(https://www.19thcenturyart-facos.com/)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충실히 작성된 연표, 추가 도판들과 더 읽을거리들은 지면의 한계를 넘어 작품을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듯 책 곳곳에 배치된 보조자료와 책의 이해를 확장시키는 웹사이트의 존재는 이 책이 오늘날 서양 근대미술 학습에 있어 표준적인 개론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의 4권의 책을 검토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서양미술 연구에서 근대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개론서에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서양 근대미술은 1789년부터 1914년까지의 프랑스 회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등장한 개론서들은 공간적, 시간적, 양적, 질적 팽창을 통해 기존의 관점을 반박했다. 또한 매체의 관점에서도 이전에는 회화 분야에 국한되었던 것이 조각, 건축, 사진, 포스터 등 시각 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로까지 확장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기존의 형식적인 연구에 더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등 이론의 세례를 받은 일련의 경향들이 미술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을 종합했을 때 서구권의 연구는 모더니즘적인 정전의 나열에서 벗어나 근대적 속성의 재사유 혹은 근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요소들의 재발견이라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4권의 책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술에서 근대는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완벽한 개론서는 세상에 없다. 이것은 각 책이 기존의 단점들을 보완하려 했음에도 새로운 문제점이나 한계들이 발견된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 개론서는 빠르게 변하는 연구 지형에 발맞추어 그 내용을 바꿀 수 없기에(추의 책을 리뷰한 어느 평자가 말했듯 개론서 집필은 여러모로 학자 자신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구시대적인 무엇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2011년 파코스의 책이 나온 뒤 미술사 또한 몇 가지 급진적 변화를 겪었다. 우선 매체적 측면에서 영화와 대중매체 연구는 양적 질적 팽창을 거듭하며 19세기 시각 문화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동시대 미디어 이론들과 함께 성장한 이러한 역사적 영화, 미디어 연구는 아직까지 19세기 개론서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한편 방법론적 측면에서도 생태학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미술에 대한 새로운 연구 풍토를 만들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의 시기 풍경화는 어떤 방식으로 자연을 구성하는가?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관람객들은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가? 이러한 연구들은 근 10년간 미술사 분야에서 인류세에 대한 관심과 함께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 개론서 단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서 소개한 책들이 시대에 뒤쳐진 무엇이라는 것은 아니다. 책에 대한 여러 리뷰들은 공통적으로 앞서 소개된 19세기 개론서들이 작품에 대한 통찰과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중요한 전거가 되며 이 분야를 막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기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19세기 미술을 교양 삼아 혹은 학부 과정 상의 공부의 일부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위 개론서들을 살펴보는 것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p.s 미셸 파코스는 2018년 『A Companion to Nineteenth-Century Art』라는 앤솔로지의 저자이자 편집자로 참여하면서 개론서보다는 심화된 하지만 최신 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한 19세기 미술사 기술을 시도했다.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정전을 중심으로 한 미술사 서술의 해체는 선형적 역사 서술이 아닌 모자이크식 역사 서술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책은 여러 저자들이 각 주제를 심도 깊게 서술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아이젠만의 책과 유사한 구성을 보이지만 아이젠만의 책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글을 배치했다면 파코스의 책은 공간적인 확장이 보다 두드러진 책이었다.(쉽게 말해 흐름을 정리해가며 공부하기에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