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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이나 Dec 11. 2023

사랑의 모양은 달라도 같을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를 있게 해 준 엄마

나에게는 두 명의 엄마가 있었다. 한 명은 나를 낳아준 사람. 두 아이를 낳고, 트럭 운전하는 남편과 살면서 커튼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판매하는 자영업자였던 평범한 가정주부. 우리 자매의 기억 속에 그녀는 일을 한다고 항상 바빴다. 당차게 커튼 가게를 해나가던 그녀.(호칭이 애매하지만 그냥 엄마라고 불러야겠다.) 우리 가족은 가정집이면서 엄마의 영업장인 그곳에서 살았다. 부엌 한 개, 방 한 개에 방 문을 열면 10평쯤 되는 엄마의 가게를 바로 볼 수 있었다. 단칸방이었지만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나와 여동생을 낳아준 그녀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나와 동생을 돌보며 자영업까지 하는 훌륭한 엄마였다. 물론 그녀를 대신해 친할머니가 우리 자매를 보살피셨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엄마가 일하는 가게에서 지냈으니까. 엄마는 항상 등을 보이고 바삐 일을 했지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했고 화낸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첫째 딸로 꽤나 사랑받았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아기 때 사진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카메라로 나를 찍으면서 언제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셨을 거다. 내 기억도 그렇다. 성인이 된 나에게  아빠는 아직도 섭섭한지 입을 삐죽 내밀고 이야기했었다. "니는 네 엄마 밖에 몰라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엄마랑 떨어지면 내내 울어서 등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이가" 내 앨범만 몇 개... 동생의 사진은 많이 없어서 그녀는 아직도 섭섭해하고 있다.


엄마와의 기억은 3살 때 잠깐... 5세부터 초등 1학년까지 인 거 같다. 3살 때는 막달인 엄마가 아빠 트럭을 몰고 나갔다가 사고가 나서 동생을 조산했던 기억이었다. 꿈처럼 가물가물... 이게 내 기억인지 데자뷔인지 몰라, 몇 년 전 아빠한테 물었더니, 욕을 내뱉으시면서 내 기억이 맞다고 하셨다. 엄마는 아빠와 5살의 나이차이가 있었다. 아빠 나이 30세. 엄마 나이 25세 때 결혼했는데 아빠 말로는 엄마가 워낙 노는 걸 좋아하고 말썽을 일으켜 친할머니가 떠넘기다시피 결혼했단다. 음... 글쎄, 그럴 수도 있지 뭐... 내가 지치지 않고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는 거 보면, 외향은 아빠를 닮아도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다들 나한테 이야기한다. 너 역마살 꼈다고... ㅡㅡ.


그렇다. 엄마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었다. 여행을 가도 꼭 우르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살랑살랑 봄이 되면 꽃밭, 공원, 산, 계곡으로 여러 가족이 모여서 놀러 다녔었다. 그런 엄마가 막달에 트럭을 운전하고 나가다 사고를 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젊었던 엄마는 활발했으니까. 나는 어느 병원 유리벽 너머에 있는 신생아인 동생을 봤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뭉개 뭉개 구름이 껴 있는데 창 너머에 쬐끄마한 꼬물이를 본 것 같다. 조산으로 태어난 동생은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작았고, 연약했다. 그래서 항상 손을 붙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기억이 확실한 7살 때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평범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리 가게는 아줌마들의 담소를 나누는 곳이었다. 엄마는 단 한 칸뿐인 방에서도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불편한 것도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유치원에 짝사랑하는 남자애 이야기를 했는데 동네사람들이 순식간에 알게 된 것이다. 작은 아이에게는 심각한 사랑앓이가 어른들이 웃고 떠드니 웃긴 일이 되어 버렸다. 엄마와 이웃 아줌마들이 웃으면서 나를 꾸미기도 했는데, 짝사랑하던 친구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은 나를 귀엽게 봤던 거 같다.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생일 때면 유치원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해주던 엄마. 글을 읽고, 쓰기가 느려 집 바로 위 학원도 보내고, 미술 학원, 태권도 학원도 보냈다. 이것저것 배우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요즘 맞벌이 부부처럼 우리도 낮에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학원에서 지냈던 것도 있었다. 나는 잔꾀가 많은 말썽쟁이였다. 학원에서 집중 못하는 것은 물론, 옆 친구꺼 베끼기, 학원 선생님 앞에서 대놓고 책 보고 답 적기, 뛰어다니면서 시끄러운 건 기본이었다. 엄마는 이런 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소리도 작고 말도 잘 못하고 소심하다면서 웅변학원을 보냈다.


그리고 연말에 웅변대회도 나가 상도 탔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양팔을 차례대로 하늘 높이 올리며 크게 외쳤었다. "이 여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어른들의 우례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엄마는 꽃다발을 건네주셨다. 내 성격이 조용하다고 생각했었던 엄마는 다른 아이들에게 쳐지지는 않기를 바랐고, 높은 자존감을 가지기를 원하셨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 본인이 그렇게 존중받고 보호받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한다. 엄마는 나에게 큰 나무 같은 존재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숨을 수 있도록 푸릇푸릇 잎부터, 넙적한 잎까지 두루 갖추고서 막아주셨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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