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둘만의 결혼생활이 독일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돌아온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결혼이라는 삶의 방식에서 동거를 제외한 나머지만큼의 의무(시댁이라든가.. 시댁이라든가.. 남편 가족 같은..)가 없기 때문에 소꼽놀이 같겠다는 것,
그리고 오지게도 싸우겠다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인생에는 두 가지가 적당히 배합될 것이었고, 연애 때 특별히 많이 싸우거나 특별히 안 싸우지 않았던 만큼 남들처럼 더 많이 싸울 것 같아 다소 걱정되기도 했지만서도, 사실은 이주 자체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가정상 자체에 대한 걱정이나 기대는 사람들의 예견을 듣는 딱 그때뿐, 걱정의 큰 우선순위에 자리잡지는 못했었다. 사실 출국 며칠 전까지 빡세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걱정을 위한 마음의 여유랄 것 자체가 없었기도 했다.
입독하고서 첫 3주간은 몇 번의 이사를 다니고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생활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잠시간의 거처가 정해지고서 알아본 어학원은 그달 하순부터 시작이었고, RPG 플레이어처럼 음식 메뉴 퀘스트에 맞춰 집 근처 여러 마트들을 던전 삼아 식재료를 구해오고 그 재료들이 알맞게 작동하는지 배합하고 연성해보는 느슨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24시간 붙어 있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살림에 있어 마찰이 없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았었다. 결혼 전 자신의 집에서 살림을 어느 정도 수행하던 착한 아들이 가족들의 습관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을 들을 때 내색은 못했지만 찔린 적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방구석 청결에 큰 가치를 두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내 방이건 사무실 책상이건 공간에 한해서는 한껏 게을러지곤 했던 것이다. 이걸 쓰면서도 내가 쓰레기같이 보일 터라 자복하는 심정으로 부연하자면, 입었던 옷이건 썼던 물건이건 무엇이든지간에 나 기억하기 편한 곳이 제자리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방치하는 나와 그에 수반하는 불결을 답답해하는 엄마의 소극적인 개입 즉 내 방 청소는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내가 집에서 잠만 자고 나오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 모녀의 가장 큰 갈등거리였었다. 엄마는 내 방의 청결도를 개선해주는 자신의 조력에 내가 감사해하길 바랐으며, 그에 대해 나는 방의 청결은 내게 큰 가치가 아니므로 엄마가 자기 만족을 위한 헛수고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바야흐로 나는 때늦은 사춘기였고, 이 극적인 갈등에서 서로가 접점을 찾은 것이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니자니,
서른 해 넘게 나와 산 엄마와도 그랬을진대 이제 갓 나와 살림을 시작한 남편과는 언감생심이었다.
나라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보길 좋아하는 남편은 부엌의 질서를 온전히 처음부터 구축해나갈 수 있게 되고는 또 이국에 와서 새로운 식재료들을 만나보게 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식사 준비를 맡았다. 그러면 나는 설거지를 하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필요 이상의 식기가 요리에 허비되었으며 손질하고 남은 식재료 찌꺼기는 또 접시며 냄비며에 한가득이었다. 한국의 반만 한 개수대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 넘쳐 있는 것을 보거나 물이 막힐 정도로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찌꺼기가 가득 차 그것을 건져내느라 비위가 상할 때면 이 새끼가 나 엿먹어 보라고 설거지 거리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놨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남편 미안 근데 정말 그런 심정이었단다). 먹고 난 밥그릇도 내 심기를 한껏 거슬렀다. 나는 심지어 쌀 미米 자엔 농부 아저씨의 여든여덟 날의 노고가 담겨 있어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는 밥상머리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거슬림들이 곧바로 싸움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거슬려하는 것에 비해 남편이 더 많은 거슬림을 묵인하고 있음을 잘 아는 게을러였고 남편은 그걸 굳이 공격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싸움의 시작은 늘 비슷했다. 사실 결혼하기 전에도 같은 식이었다.
1. 나는 남편에게 특정한 행동 또는 행동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2. 남편은 그 기대를 저버린다. 3. 1의 수행을 애정의 척도로 여기는 나는 애정 표현이 박한 인간에 대해 무한정 서운해지면서 분노하기 시작한다. 애주가들의 반려자 알콜기가 부채질하는 감정 격화는 덤.
달라진 것은 4. 남편의 반격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new!)
남편은 내가 집을 비웠을 때 집안 청소를 해놓는다거나 학원에서 돌아왔을 때 허기질 나를 위해 쿠쿠에게 밥을 시키는 것이 자기의 애정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요구하는 대로는 아닐지언정 자기는 나름의 애정표현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주지했다시피 나는 집안의 청결에 큰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거니와 혼자서 쌀밥을 퍼먹는 일은 간장계란밥으로 말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살림에 관해 말하자면 나도 말할 거리가 전무한 건 아니었으니.
누가 옳고 그르고, 서로의 논리구조가 어떻게 상충되었는지, 서로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고 그것을 어찌 해결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싸움의 프로세스가 추가되면서 그 기간이 늘어났고,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으며,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룸에 살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싸우다가 잠든 남편 옆에 있기 싫어서 당장 새벽에 떠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검색하다가 부엌 구석에서 쌀가마니를 베고 잠들었고, 또 어느 날은 두 시간 넘게 걸리는 친구네 도시에 가는 기차를 검색하다가 (또) 잠든 사람 깨워서 더 싸우고 자기도 했다. 그 밤 안에 풀리면 다행이었다. 나에겐 내 논리가 늘 옳았고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빠른 사과를 하는 (내가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습관 덕에 남편의 사과라는 딱 한 가지만 있으면 상황이 종결될 수 있는데 내 맞수는 그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인간이다. 다음 날까지 미안하단 말이 나오지를 않으면 옆구리 찔러서 사과를 받아내거나,
답답한 마음에 내가 집을 뛰쳐나가거나였다. 극히 드문 경우의 수나마.
회사에 다닐 때 상사 한 분이 20년 전 지금의 나와 비슷하게 독일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하셨었어서, 내가 퇴사를 앞두게 되었을 때 자신의 독일 신혼 생활 이야기를 종종 해주시곤 하셨다. 그때 들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편분과 싸우고 나면 말도 않고 기차 타고 다른 도시 돌아다니다가 들어가셨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모종의 이유로 대판 싸우고 집에서 뛰쳐나와 저렴한 기차 아무거나 잡아 타고 당시 이름조차 알아보지 않았던 인근의 어떤 도시들로 넘어가 공원을 산책하거나 미술관을 엿보며 자꾸만 울리는 휴대폰을 무시하는 상상만으로도, 이국에서의 신접 살림에 대해 별로 있지도 않던 불안마저 스러지곤 했다.
실제로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할 전제조건은 잘만 완성되었는데, 문제는 우리가 늘 밤에 싸운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나의 사회적, 문화적 나와바리는 홍대 권역에 속해 있었고, 나는 잠깐의 어학연수를 빼고는 평생 서울에서 살았으며, 애주가로서 나의 밤은 길었다. 심야에 어디서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름의 리스트가 있었으며, 갑작스레 터지는 분통을 다스리고 싶을 때에 접선을 꾀할 연락처 또한 적잖았고, 아니어도 전화통을 한참을 붙잡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내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실 수라도 있었다.
그리고 이국에 떨어진 내게는 그중 그 무엇도 없었다.
독일의 상점가는 여덟 시면 다 닫는다. 이는 내가 정처 없이 살 것도 없으면서 상업지구를 싸돌아댕길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핸드폰을 떳떳하게 꺼두고 몇 시간 은신할 수 있는 영화관은 돈만 버리는 일일 터. <기생충>의 개봉을 기다리는 바다. 한국 영화 화이팅.
내 징징거림을 받아줄 친구들은 모두 GMT+9:00, 한밤중이다. 그 이를 갈던 밤 중 단 한 번 전날의 음주 때문이었는지 프로젝트로 인해 이른 출근을 해야 해서였는지 새벽에 깬 친구와 간신히 카톡으로 접선할 수 있었다. 저렴한 선불 요금제로 통신망을 사용 중인 사람에게는 더군다나 집 밖에서의 보이스톡이란 꿈도 못 꿀 일이거니와.
캔맥주 한 개 사들고 벤치에 앉아 멍때릴 수 있는 안전한 공원을 알지 못한다. 사람 많은 라인강변이 가장 만만히 떠오르지만 저녁 7시 이후로 배차간격이 20분 30분을 넘겨버리기 일쑤인 버스들을 생각하면 돌아올 길이 더 걱정이다.
중앙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한두 시간쯤 걸리는 도시로 넘어갔다가 바로 돌아올까도 생각했지만 예전 같지 않게 연착이 잦은 독일철도가 맞추지 못할 아다리에 관한 걱정과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꺼리는 공간이 심야의 중앙역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니 그 스트레스가 남편과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더 커질 지경이다.
무엇보다 술이 보장되는 시간대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독일인에게서마저 니하오를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번은 정말 너무 뭐라도 해서 이 분을 해소하고 싶었던 나머지 이 도시에서 안 지 가장 오래된 학원 친구에게 연락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그러나 친구의 다정함과는 별개로, 나의 비루한 영어 실력이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과연 내가 급 만남을 제안한 것 만큼 그 친구에게 충만한 우정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 내밀한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아니오였고,
그런저런 이유 즉 내가 결국에는 쫄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분에 못 이겨 집에 나간 두 번 모두 결국에는 두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순순히 제발로 집에 돌아왔었다. 흑..
지금은 다행히도 가장 자주 싸울 때 살던 그 집보다 더 넓은 곳에서 지내고 있고, 침대가 더 넓어져서 웬수 같다며 따로 자는 양도 취할 수 있으며 작은 방이 하나 더 딸려 있어서 문 닫고 들어가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다행히도 서로가 해줄 수 없는 것이나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한 이해가 생긴 덕에 싸우는 일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일과가 생기면서 서로가 하지 않는 것에 백안시할 시간이 줄어들고 생겨난 시간표에 따라 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대신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날이 늘어났으며 또 내 비위가 전보다 나아진 것도 한몫하긴 했다.
이 갈등의 시간을 한국에서 치러냈었다면 (내가 친구들이랑 술 안주로 삼느라)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갈등을 알았겠고 (그동안 내가 취해 있어서) 더 오랜 시간 싸웠겠고 서로 말고도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아 갈등의 처리 자체에 골몰하지 못했을 것을 짐작한다.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가 않아서 집을 뛰쳐나와야만 할 때나 뛰쳐나왔는데도 할 것도 갈 곳도 없을 때면 이 낯선 하늘이 원망스러워 서럽기가 한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서럽고 싶지 않아서 나름 원만한 절충점을 찾아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 하늘 아래 정말은 단둘뿐이라는 사실도 계속해서 확인되었고.
물론 두 번째 뛰쳐나감은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고, 생활이나 밥벌이와 함께 가정에서의 갈등을 지속하는 것 또한 언젠가는 새로이 맞딱뜨릴 과제겠으나..
(커버 사진은 어느날 집을 뛰쳐나와 돌아다니다 찍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