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렇지 않으면 되는 것을 왜 신경 썼을 까
사람이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내뱉어졌고 그걸 본 이가 반응을 했을 때 베어지는 마음의 상처들, 조각들이 모아졌을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즉 자유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가진 편견, 선입견, 여러 가지 오해 등을 가지는 것 역시도 자유이자 표현하는 것도 자유에 속할 수 있다.
물론 자유만 외치고 책임이 없다면 방임이 되고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회에서의 편견 같은 인식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한 상황에서는 이 또한 자유롭게 실천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도 개개인의 의견과 생각을 말하는 것에 방해할 자격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사회인 덕분에
그와 반대되는 의견도 충분히 낼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한 갈등이 생기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런 과정에서 좋은 가치와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들도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경우는 침묵과 유지만 있을 뿐이며,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는 더 나아갈 개선의 여지를 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누구든 넓게 세상을 보며 비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어디서나 표현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도 나름 상처 입고
손해 입는 것이 조금은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생명, 일상에 위협이 가해지는 것이 아닌 경우는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타당한 근거와 함께
외칠 수 있고 선언할 수 있는 건 굉장히 좋은 사회인 것이다. 본인과 반대되는 의견 역시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것 좋은 현상이다.
민주주의 자유가 있는 나라들의 대부분은 이런 모습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서 입은 상처, 타인으로부터의 비판적 시선으로 스스로가 힘든 마음을 갖게 된다면 위로를 표현하고 싶지만, 이 또한
스스로가 가진 내면의 근거와 단련의 정도에 따라서는 어떠한 위로도 닿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환경에서도 나 자신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은 나 자신의 생각 전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모진 편견이 섞인 말을 건네었을 때 이에 대해 ‘스스로 역시도 자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내면의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좋은 소리만 해주진 않을뿐더러, 자신도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모두를 포용하고,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으며, 솔직한 깊은 내면까지 살펴본다면 제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듯이, 타인들도 나의 모든 것을 수용해 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비우는 내면의 습관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의 인생은 내가 그려나가는 것이고, 나의 선택과 결과, 책임 역시도 나의 몫이다.
이 몫을 다 할 주인공은 ‘본인’이라는 것.
타인이나 사회가 내리는 평가, 편견 등으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느끼는 건 어떤 환경이 갖춰져야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의 당당함, 내 인생을 온전히 존중할 수 있는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깊이 내면을 차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 본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도 사회의 보편적 윤리선은 서로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도의적인 매너는 지킬 수 있으면서도
질서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당당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역시도 자신이며, 이를 옆에서 도와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여정과 소중한 타인의 여정이 함께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한 두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모든 이들과 함께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것은 자신의 선택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