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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완열 Sep 02. 2021

EP1. 로마 테르미니역

바이올린 선율에 버무린 해물 리조또를 즐기다.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트랜이탈리아 발권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표를 예약할 때부터  어려웠다. 결국 전화를 해야했고 전화받은 직원 서툰 영어와는 달리 자신감 있게 예약을 확인해 주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화법을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은 확실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대답하는 재주가 있었다.)그리고 트랜이탈리아 열차는 시간을 지키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또한 저가 티켓이라 환불이 안 되는 표였기 때문에 세심하게 예약하고 확인해야 했다.


공항에서 테르미니 역까지 가는 길가에 이탈리아의 시골전경이 보였다.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주택들이 뜨문뜨문 보였는데 어딜 가나 시골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빨랫감이 널려있는 집도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테르미니역은 내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어린시절 지방에서 갓 상경하여 서울역을 마주쳤을 때의 그 느낌과도 비슷했다. 르미니 역 앞에는 노숙자 같은 사람들이 플랫폼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불현듯 로마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얘기가 떠올라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여행 짐 아니 정확히는 아내의 옷(심지어 내 캐리어에도 들어 있었)이 가득 담긴 커다란 캐리어를 각자 하나씩 끌고 다녔는데, 테르미니역 주변에 앉아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노숙인들의 눈빛이 마치 '너희들은 돈많은 관광객이잖아? 좀 도와줘~' 라고 말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거리를 벌리며 캐리어를 꼭 부여잡고 예약숙소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2일 만에 내와 대판 싸우게 되는데, 아무리 숙소를 찾아봐도 간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캐리어는 무겁지, 골목마다 노숙자들이 자꾸 끈적한 눈빛을 보내지, 미리 준비한 유심칩은 안되지...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역 근처에서만 골목을 2시간 가까이 배회했다.


원래 내 여행 가계부는 지출만 기록하는데, 이날은 유일하게 짧은 소감이 써져있다. “유심 에러로 개고생함. 2시간 정도 무거운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비슷한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저녁 먹으니 9시다. 계획했던 관광 못함”


메모를 보니 그때의 악몽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길잡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아내의 캐리어도 같이 끌었는데, 양손 가득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미지의 골목에서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헤매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유심 개통을 하고 숙소와 전화연결이 됐는데, 그 숙소는 테르미니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골목에 있었다. 어찌나 약이 오르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나던지. 특히 결혼한 지 이틀 만에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내 밑바닥을 드러낸 거 같아서 부끄러웠다.


수다스러운 에어비엔비 사장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방을 배정받아 몸을 뉘다. 잠깐 누웠는데 몇 시간이 삭제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우리는 물먹은 빨래처럼 늘어진 몸을 숙소 밖으로 건저 내어 거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곧 배가 고파져서 트립어드바이저 앱으로 숙소 근처에서 가장 평점이 높은 식당을 찾아갔다. 일종의 피자전문점 (pizzeria)이었는데, 단순히 숙소에서 가깝고 평점이 높아서 갔다. 식당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안 영상으로 봐왔던 전형적인 유럽식 노천카페 분위기라서 아주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다.


특히 거리의 바이올리스트가 인상적이었다.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평범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세련된 바이올린 선율을 자유자재로 연주했다.

바이올리스트와 노천 테이블

좁은 골목이 늘어선 배경에 식당 앞 길가에 나란히 놓인 테이블, 여유 있게 담소를 나누며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섬세한 바이올린 선율지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비록 핏발 선 눈에 까치집 머리를 피곤한 여행객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탈리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짠 맛 해물 리조또

사실 이 식당에서 주문한 피자와 해물 리조또는 하게 짰다. 그래도 첫날의 설렘과 노천카페의 분위기는 '짠맛'마저 희석시켜주는 듯했다. 즐겁게 짠 음식을 즐기며 숙소에 돌아와서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그날 나는 알지 못했다. "짠맛"은 이탈리아 여행 내내 따라다닐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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