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시국에서 방대한 양의 예술품관광을 마치고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왔다. 새벽부터 줄 서서 입장하여 오후 다섯 시까지 돌아다녔으니 여기저기 몸이 쑤셨다. 그러나 나는 최소비용, 최대 관광의 가성비 정신으로 무장된 상태라 일분일초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설령 체력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이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많이 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숙소에서 받은 얇은 로마시내지도한 장을들여다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산탄젤로 성을 거쳐 나보나 광장, 판테온, 마다마 궁전, 트레비 분수, 베네치아 광장,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을 순으로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5월의 로마는 그리 덥지 않았다.
산탄젤로 성은 성천사 성이라는 뜻으로 로마제국의 황제 히드리아누스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세운 무덤이었다. 네모난 성벽 안에 둥근 모양의 성이 들어가 있는 독특한 형태인데, 바티칸 시국과 산탄젤로 성은 지하도로 연결되어 교황의 피난처, 요새 등으로 쓰였다. 지금은 이탈리아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탄젤로 성에 연결된아치 모양의 다리 아래로 로마의 젖줄 테베르 강이 흐른다. 건설하는데 백 년이 넘게 걸린 다리는 성천사 조각들이 시립 하여 문지기처럼 성을 지키고 있다.
로마 산탄젤로(성천사) 성
골목길을 누비다 보니 탁 트인 직사각형 모양의 나보나 광장이 보인다. 광장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소묘인지 크로키인지 모를 그림을 관광객들을 위해 그려주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관광객들은 이 장소가 고대 로마시대에 전차경기장이었음을 알고 있을까.(참고로 당시에는 나도 몰랐음) 어린 시절 토요명화 '벤허'에 나오는 전차경기장은 이 광장보다 훨씬 크고 잔혹한 곳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콜로세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뾰족한 돌기가 달린 전차 수레 바뀌가 돌아가며 상대 전차에 부딪혀 부수고 죽이는 살육의 축제. 지금은 예쁜 분수대와 거리의 화가, 관광객이 가득하다.
사실 관광객에게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가 유명하다.'파우미 분수' 또는 '4대 강의 분수'라고 하는 분수인데,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걸출한 조각가 베르니니가 만든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4대 강이 유명했는데, 분수의 4대 강은 다뉴브, 갠지스, 나일, 라플라타 강으로 각각의 대륙을 의미한다. 강의거인들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은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오벨리스크는 무슨 이유인지 메이드 인 로마제품이다. (로마에 있는 대부분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약탈한 것이다.)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와 화가들
멀리서 거대한 지붕이 보여 지붕만 보고 걸어가 보니 판테온이었다. 당시 기념사진만 대충 찍고 지나쳤는데,몹시 후회하고 있다. "음 기둥이 멋진 어디서 많이 본듯한 신전같이 생긴 건물이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실제로판테온은 거의 유일하게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 로마 신전이맞다.
그리스어로 판은 '모든', 테온은 '신'을 의미하여 판 + 테온은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름다운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단의 전면부에는'세 번째 집정관 루키우스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했다'라는 문구가 써져 있다. 그런데 현재의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 번째로 개축한 것이기 때문에 말이되지 않는다. 다만아그리파가 건축한 첫 번째 판테온의 자재를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판테온이 오랫동안 양호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져 있을 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당시 교황에게 협조하기 위해 가톨릭 성당으로 용도변경(?) 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의 신전에서 기독교 성전으로 바뀐 것이다.
정오 무렵이 되면 판테온 내부 돔 천정의 원형창으로 태양 빛이 들어와 대리석으로 치장된 실내를 비춘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문득 오늘 정오 무렵 둘러본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이 생각났다. 베르니니는 교황의 지시로판테온에서청동을 가져다가 발디키노(교황 전용 재단)를 만들었다.쿠폴라(돔형 천장)의 채광창에서 '발다키노'로 쏟아지는 빛은 저절로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들 정도로 장엄하고 신비로웠다. 정오 무렵 판테온의 내부도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어쩌면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을 설계할 때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 성전은 이교도 신전에서 청동뿐만 아니라 빛을 사용하는 조명 기법까지 가져간 셈이다. 이교도의 신전은 기독교의 성전에 아낌없이 내어주고 목숨을 부지했으니 남는 장사가 아니었을까.
성 베드로성당의 발다키노
고대 로마 신전 판테온
트레비 분수는 찾기 어려웠다. 애타게 찾아 헤매었다. 판테온에서 7-800m 거리였지만 길을 찾지 못해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길을 찾아 헤매다 궁전을 발견했는데, 마다마 궁전이었다. 멋진 근위병 복장(?)의 경비병이 정문을 지키고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 공화국 상원 건물이었다. 어쩐지 검은색 세단이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은 트레비 분수는 공사용 비계로 뒤덮여 있어 힘이 쫙 빠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대로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베네치아 광장 앞에서 아내와 작은 언쟁을 했다. 영어를 못하고 남들에게 말을 잘 못 거는 내성적인 아내 덕분에 그동안 현지에서 식사 주문, 티켓팅 등 모든 여행 수발을 들다 보니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아내의 논리는 본인은 영어를 못하니 할 줄 아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 그 말에 그럼 저기 한국인 가이드 무리가 보이는데 저기 대로에 보이는 조형물 이름이 무엇인지 한국말로 물어봐 줄 수 있냐고 했다. 그곳이 베네치아 광장이었다.
아내는 한국인들에게 묻지 못했다. 아니 묻지 않았다. 그동안 내 서비스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나의 작은 부탁 하나도 들어주기 싫었던 걸까. 한국말인데도 말이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향후 여행 파트너로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부부간의 갈등은 항상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베네치아 광장을 거쳐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포로로마노의 야경은 신비하고 고풍스러워 보였지만 즐길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에 도달해서야 서로의 서운한 점에 대해서 얘기하고 달달한 코카콜라 한 병을 사멕이고서야 화해를 할 수 있었다.그래서 포로로마노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없고 콜로세움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은 남았다.
마디마궁, 트레비분수, 베네치아 광장
포로로마노
돌이켜보니 우리는 숙제를 하듯 로마 명소 사진 찍기에 급급했다. 마치 게임 퀘스트를 클리어하듯 지도상에 랜드마크를 하나씩 해치웠다. 이 조형물이 무엇인지, 얽혀있는 역사는 어떤지 사색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야말로 로마를 겉핥았다. 덕분에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 여행을 간 것 같이 새롭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