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작가 일을 그만두고, 나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작가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최종 목표였던 드라마 작가가 되려면 학교에서 배운 걸로는 부족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연수원에 들어가면
현직 작가들에게 드라마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목표를 다시 세웠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숙식은 해결하고,
돈을 모아 다시 올라가자.”
그게 내 계획이었다.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다가
그 당시 유행하던 ‘준코 로바다야끼’에 들어갔다.
2층짜리 가게는 매일 만석이었고,
주방 이모들은 따뜻했고, 함께 일하는 아이들은
밝았다.
오후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12시간,
몸은 녹초가 됐지만 이상하게 행복했다.
150만 원의 월급.
그 돈이 내게는 희망이었다.
캐릭터를 관찰하고, 대사처럼 사람들의 말투를
기억하고, 모든 게 글감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성실하고 자상한 남자친구도 생겼다.
밤샘 근무로 몸은 힘들었지만,
그 시절 나는 정말 잘 웃었다.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국에서 일하던 아빠가
엄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큰언니만 결혼한 상태라
엄마는 “다들 시집가기 전엔 절대 안 돼.”
라며 버텼지만, 아빠는 완강했다.
결국 변호사까지 선임하며 소송을 준비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될 것을… 왜 저렇게까지 할까.”
엄마는 매일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말했다.
“길임아, 잠시 언니네로 가 있을래?
엄마 혼자 있고 싶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의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또 버려지는 기분.’
유기된다는 단어가 너무도 익숙했다.
언니는 가정을 꾸리고 첫째를 임신 중이었고,
둘째 언니는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혼자였다.
자취를 하기엔 돈도, 용기도 없었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계속 그 생각만 했다.
24살의 나.
꿈도, 자리도, 마음 둘 곳도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은 내게 커다란 균열을 남겼다.
나는 늘 믿었다.
‘내가 성공하면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 거야.’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버텼는데,
결국 가족은 흩어졌고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안에 우울이 조용히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