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비어 있었던 자리

by 엣지있는 김작가

일주일쯤 면회를 갔을 때,

아직 차도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일 병원에 가서 작은 지오의 손을 잡고

얼른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때 문득, 큰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장바우로 이사해서 아기가 아플 수 있다는 말.

미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무당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그 무당은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겠다며

상값만 달라고 했다.

금액은 30만원이었다.


그때 우리는 신랑 외벌이였다.

전세자금대출 이자에, 보험료에, 공과금을 내면

세 식구가 쓸 생활비는 50만원도 채 남지 않았다.

매달 적자였다.


왜 돈도 없는데 아이를 계획 없이 낳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으로

배란이 잘 되지 않는 몸이었다.

어릴 때부터 생리는 6개월에 한 번,

길게는 1년에 한 번이었다.


결혼 전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아이를 원하신다면 빨리 가지는 게 좋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배란이 줄어들 수 있어요.”


큰언니도 인공수정과 시험관을 반복해서

몇 번의 유산 끝에 아이를 얻었었다.

나는 신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미리 털어놓았고

우리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첫째는 결혼한 지 1년이 되기 전에

찾아왔고, 둘째는 첫째 돌이 되기 전에 찾아왔다.

우리는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30만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오만 살릴 수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때 병문안을 왔던 큰언니와 형부가

출산 축하금으로 주고 간 30만원이 생각났다.

나는 그 돈을 미련 없이 보냈다.


조리원에서 2주 머물 예정이었지만

나머지 1주일을 환불받고 나왔다.

원장님은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조용히 배려해 주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신랑과 첫째 효주와 함께 지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훨씬 편안했다.


보름쯤 지났다.

신랑은 회사에 출근했다가

점심 면회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왔다.

나는 효주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제발 퇴원할 수 있기를.

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 갔더니

지오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너무 놀라 간호사 선생님께 물었다.


“지오 어디 있어요?”


“어제 밤에 좋아져서 호흡기 뗐어요.

지금은 일반 침대에 있어요.”


그곳에 누워있는 지오는

다른 아기 같았다.

약물 때문에 잔뜩 부어있던 얼굴이

붓기가 빠지자 꽃미남이 따로 없었다.


“고마워, 지오야…”

눈물이 났다.


“정말 고마워…

너무 고맙고, 너무 고생했어.

우리 이제 누나 만나러 가자.”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