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선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언니, 내일 뭐해요? 별일 없으면 나와요. 딩기요트 가르쳐줄게요."
같은 세일링 팀에서 요트를 타는 S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같은 팀이라고 해서 실력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S는 대학생 요트선수, 그러니까 내가 처음 만난 현역 선수이다. 팀 수준에 한참 미달해서 나머지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것인지, 조금 봐주면 잘 탈 재목으로 보여서인지, 그건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나의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어제 우리 팀은 두 조로 나누어 J-24 세일링을 했는데, 두 번째 조였던 나는 기다리는 동안 레이저 딩기요트를 탔다. 팀 수준에 부합하는 팀원이 되려면 나 같은 신입은 틈이 날 때마다 연습을 해야 한다. 혼자 집에서 연습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니 나왔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러더를 잡아봐야 하는 것이다.
“힐 잡을 때 과감하게 체중을 더 실어봐”
“겁먹지 말고 배 밖으로 몸을 내보내”
“엉덩이를 뒤로 쭉 빼야지”
오늘 좀 잘 탔나 생각하며 (자기애가 충만한 나는 이렇게스스로에게 관대하다.) 지상에 올라오니, 보는 분들마다 똑같은 지적을 해주신다. 세일에 바람을 잘 받으면 요트가 기우뚱 힐이 걸리는데, 이때 몸을 뒤로 젖혀서 체중으로 기울어진 배를 평평하게 만들어야 요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물에 빠질까 무서워서) 몸을 배 밖으로 못 내보냈고, 힐을 잡지 못했고, 그때마다 (안 넘어지기 위해서) 세일을 풀어버렸다. 바람을 활용하지 못하고 흘려보내 제대로 세일링을 못했다는 말이다.
잘못된 습관은 바로 고쳐야 하는 법. 그러니 시의적절한 그녀의 제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코칭해주러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나오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음날, 어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실 어제 메인시트가 풀려 한참을 물에 빠져 있었고, 선생님이 구하러 와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저 고백하자면, 10번쯤 캡사이징 되어 물에 빠졌었고 그 물을 500ml는 족히 마신 것 같다. 앞에서 잘 탔나 생각했다는 건 허세이고 거짓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내 실력을 잘 안다.) 꼼꼼히 범장을 하고 세일링을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엉덩이 쭉. 뒤로 쭉, 이거 하나다!'
머리로는 여러 번 되뇌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S가 내 뒤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언니, 풋 벨트를 발목에 걸지 말고 발가락 가까이 발등에 걸어요. 무릎은 그렇게 굽히지 말고 최대한 쭉 펴고요. 엉덩이가 걸쳐지는 게 아니라 허벅지가 선체에 닿는 거예요."
물에 안 빠져보겠다고 그동안 '풋' 벨트를 '앵클' 벨트로 사용했었다. 그동안 선체에 걸터앉아서는 이게 엉덩이를 다 뺀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쫙 펴야 하는 무릎은 다음 동작을 빨리하겠다는 일념 하에 줄곧 굽히고 있었다.
S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예리하게 나의 문제점을 포착해서 정확한 디렉션을 줬다. 그녀의 코칭 덕에 오늘은 한 번도 캡사이징 되지 않고 세일링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물에 빠지지 않고 세일링을 한 날인듯 하다.
S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새하얀 피부에 예쁘게 메이크업을 한 앳된 친구가 체중관리를 해야 한다며, (밥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엄청 많이 먹던 장면이다. (나만큼 많이 먹는 그녀가 옆에 앉아서 좋았었다.) 앞에서 말했던 힐을 잡는, 체중을 싣는 동작 때문에 요트선수에게 가벼운 체중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보디빌더같은 남자들이나 드는 줄 알았던 무게를 치며 근력운동을 하는 그녀가 그렇게 프로페셔널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진짜 ‘선수’였다. ‘엘리트 선수’ 말이다.
운동 좀 한다는 사람도, '선수'와는 실력을 견줄 수 없다. 흔히 '선출(선수 출신)'이라 부르는 엘리트 스포츠 선수 출신은 보통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과 완전히 레벨이 다르다. 일단 타고난 운동 능력도 차이가 나지만, 더 중요한 건 연습량의 차이다. (이은경,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중에서)
책에서만 보던 선수를 만나 그녀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연습량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요트장에서 하는 해상훈련을 매일 3시간 이상씩 했다고 했다. 매일, 그것도 개인 체력 훈련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영화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인은 고등학교 야구부의 유일한 여자선수이다. 중학교 때까지 야구를 하던 여학생도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 있는 야구부가 없어서 야구를 그만두게 되는데, 주수인은 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을 했다. 이는 최초 여자 고등부 선수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기사화되고, 그 사진이 교장실에 걸릴 만큼 특별한 일이다.
주수인의 꿈은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자가 뛸 수 있는 프로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정말 불가능한 것이 맞는지, 기득권 남성들이 여성에게 개방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작은 체구의 여고생 주수인이 거들먹거리는 프로선수에게 너클볼을 던져 아웃시키는 것이나, 프로팀 구단주가 화제성, 스타성 있는 그녀에게 프런트 제안을 하자 선수로 입단하기 위해 트라이아웃에 참여한 것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통쾌한 장면들이 그렇다.
야구와 요트가 무슨 상관이냐 하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 영화가 떠올랐다. 그동안 요트를 타면서 동호인 중에 여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이 의아했었다. 요트 선수나 선생님을 여럿 만나면서도 여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일한 여자 선생님이 우리 팀 스키퍼 언니이다.) 하다못해 예능 프로그램 <요트 원정대>의 멤버도 전원 남자이지 않나!
요트선수들은 중등부까지는 옵티미스트라는 요트를 타는데, 이 종목은 소년체전에 여자부가 별도로 있다. 때문에 각 시도에 여자선수 육성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다. 상황은 고등부로 올라가며 달라지는데, 여자선수의 경우 420이나 레디얼로 종목을 바꾸게 되지만, 전국체전에는 여자부 경기가 따로 없다. 여자부가 따로 없다는 말은 남녀 구분 없이 경기를 한다는 것인데, 컨트롤할 수 있는 힘, 무게 등의 이유로 여자선수들이 타는 작은 레디얼과 남자 선수들이 타는 큰 레이저의 스피드와 기량은 꽤 차이가 난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 소속으로 지원을 받으며 선수생활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에는 소속 시도협회의 지원이 성적이 우수한 남자 선수들에게 집중되고, 여자 선수들은 자비로 활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여자 실업팀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 정도면 아무 상관없었던 야구와 요트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 <야구소녀>는 주수인이 연봉 6,000만 원을 받으며 여성 최초로 프로 2군에 입단하며 끝난다. 23살의 S가 현실의 주수인이 되면 좋겠다. 요트계에서 그게 어떤 길이 될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이나 예리한 집중력이라면,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에게조차 "언니, 오빠" 부르며 코칭해줄 수 있는 지도력과 리더십이라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은 안다.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주위 선수들이 그녀에게 기대어 위로받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이런 포용력과 따뜻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지금은 영화적 상상력쯤은 현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로봇도, AI도, 자율주행도 가능한 세상인데, 여자 선수에게 기회가 열리는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글: Edi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