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처음 생겼을 때 유일한 여성 팀이 대회마다 출전을 하니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그게 실력 때문은 아니었었거든? 그런데 5년 만에 우승을 다투는 팀이 되어있더라고.”
성장 영화나 스포츠 영화의 대사 같은 이 말을 실제로 들었다. 이미 실력을 갖춘 팀에 이제 막 합류한 나에게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격려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뼈가 담겨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팀 원년 멤버들의 말속에서 캐치해낼 수 있었다.
요트학교를 중심으로 멤버가 구성되고 만들어지다 보니, 요트학교 선생님들의 코칭과 도움으로 팀이 빠르게 자리를 잡은 것은 사실이었다. 대회에 나가려면 대회장까지 배를 옮겨야 하고, 크레인 작업, 리깅 등 배 세팅 등을 새로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을 요트학교를 주축으로 도와주시니 주변에서는 ‘남자들이 세팅해주면 배만 타고 내려오는 공주들’ 같은 시선들이 생기고 말이 많아졌을 것이 뻔하다.
“주말에 해상 훈련을 하고, 주중에 따로 기계나 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영상도 책도 많이 봤지. 우리 팀 스스로 하고 싶었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그때는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짐작컨대, 실력을 키우는 것에 더해 그 편견을 깨는데도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다. 종종 여자들은 예상치 못한 것, 이를테면 주변의 시선이나 오해를 바로잡는 데에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이 중심에는 캡틴 K 언니가 있다. 내가 K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겨울 36피트 킬보트 수업에 수강생으로 참여하면서였다. K36은 선체가 11m, 메인세일 크기만 해도 50㎡쯤 되는 큰 요트이다. 요트 한 척당 한 명의 코치가 배정되었던 이 수업에서 K 언니는 4명의 코치 중 유일한 여자였다. J24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직후였고, 최신의 레이싱 룰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있는 터라 언니는 매치레이싱 룰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언니의 반경 5미터 레이더 안에는 함께 잡히는 또 다른 한 명이 있으니, 바로 언니의 남편 되시겠다. 항상 팀 연습 영상을 찍어주시고 이안 접안에 도움을 주시기에 처음에는 형부의 역할이 선수의 매니저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코치였고 감독이었고 무엇보다 동료 선수였다. 생일선물로 세일 수선용 바늘과 실, 스플라이싱 키트를 선물하는 남편이라니, 이런 게 제대로 취향을 저격한 진정한 로맨틱이라는 것을 둘을 보고 깨달았다.
형부는 언니보다 더 많은 요트 대회 경력을 갖고 있는 베테랑 선수였고, 협회 임원이었으며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평생 탈 배를 이미 다 타서 이제 차례를 넘겨준’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원 없이 활동했다 해도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만족이란 게 있나? 이렇게까지 외조를 하는 게 가능한 건가?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보냈으면서 여전히 다정한 모습으로 다니는 저 모습이 진짜일까? 가자미눈을 뜨고 의심해봤지만, 그럴수록 부러워지기만 했다. 결혼과 출산은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 경제, 여가 활동에 절대적인 손해라는 나의 단단한 고정관념에 치명적인 금이 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에서 태미와 리처드 커플은 타히티에서 캘리포니아까지 6500km에 이르는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시작한다. 태미는 성인이 되자마자 샌디에이고를 떠나 멕시코에서 서핑을 즐기다가, 요트에서 셰프로 일하다가, 이곳저곳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리처드는 조선소에서 일하며 스스로 만든 요트로 혼자서 세계를 여행하는 섬세하고도 강한 남자이다. 리처드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만난 운명의 태미와 함께 세계일주의 계획을 세우고, 둘은 지인의 고급요트 딜리버리인 이번 태평양 항해를 통해 여행비용을 마련하려는 계획이었다. 바다를 사랑한 이들에게 요트 위에서의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허리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팀이 J24로 연습을 하던 중에 스피네이커에 문제가 생기면서, 급한 대로 바람에 춤을 추고 있는 스핀 세일을 온몸으로 안고 고정하려던 크루가 스핀과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인간은 바람을 조종하고 이용해서 몇 톤짜리 배를 움직이는 능력을 가졌으니 얼핏 대단한 존재인 것 같지만, 자연 앞에서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람 한 방에 속수무책으로 날아가 물에 꽂힐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 목격하고 말았었다. 내 눈앞에서 크루가 물에 빠진 것은 영화 속 파도에 태미와 리처드의 요트가 뒤집어진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형부가 모터보트를 타고 구조를 오면서, 수심이 낮은 곳으로 흐른 요트의 킬이 바닥에 박히는 것을 막겠다고 물속에 들어가 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빨리 올라와! 올라오라고!"
이제껏 그렇게 다급하고 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바로 배 위로 올라왔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 나는 눈치도 없이) 리처드가 키를 잡고 허리케인과 싸우며 태미에게 안전한 선실로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태미가 리처드의 말을 듣고 들어가던 그 장면을 떠올렸었다. 눈앞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었다.
우리팀은 오늘 J24가 아닌 K36으로 훈련을 했다. 올여름에도 킬보트반 코치를 맡고 있는 언니가 적극적으로 우리 팀의 K36 훈련을 추진한 덕분이다. 모르긴 해도 배를 빌려야 했을 것이고, 함께 타고 코칭해줄 코치와 선수들을 섭외해야 했을 것이고, 킬보트 수업 중인 다른 배들과 함께 레이스를 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작업을 혼자서 묵묵히 해냈으리라. 처음 타보는 종류의 요트에 흥미를 갖도록 팀원들에게 동기 부여하는 일마저도 그녀의 몫이었다.
요트 세일링을 즐기기 위해 가장 큰 어려움은 요트 구입비나 유지비 같은 돈일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이라고 한다. 원대한 항해의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 주변에 “저도 한 번 태워주세요”라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이를 위해 준비하고 훈련하는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함께 헤쳐 나갈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훌륭한 요트가 준비되어도 주변에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정작 대회에 나갈 팀을 못 꾸리거나, 사람 모으는 것이 힘들어서 항해에 흥미를 잃고, 사놓은 요트가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여럿 들었다.
우리 팀도 예외는 아니었어서, 시합 출전 직전까지 크루를 구하느라 진을 빼고 결국 사람 수만 채워서 훈련도 못한 채 시합만 나갔던 적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오히려 크루가 많아져서 조를 짜서 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상황을 이렇게 돌려놓은, 그 힘든 일을 차곡차곡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캡틴 K언니이다. 언니는 사람을 키우고, 팀 사이즈를 키우고, 이제는 요트의 사이즈까지도 키우고 있다. 아마도 오늘의 K36 훈련이 그 발걸음 중 하나일 테다. 팀 정기 훈련을 끌고 나가는 것 이외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팀원들을 원거리 항해에 참여시키려 노력하기도 한다. 여러 상황을 겪어보고 경험치를 높일 수 있도록 말이다.
다음 계획에 대해 묻는 나에게 언니는 한 번도 큰 그림을 그리고 움직인 적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저 한 달 뒤에 열리는 대회, 그다음에 열리는 대회에 집중해서 연습하는 게 전부라고 대수롭지 말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적극적으로 국내 대회뿐 아니라 일본 대회, 중국 대회 등에 많이 나갔다. 대회 주최 측에 연락해서 출전권을 얻어내면서까지 말이다.
그것이 계획된 일이건, 자연스럽게 흘러온 길이건, 내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꿈을 실현해가고 있는 언니를 보는 게 참 좋다. 그녀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곧 여자 아마추어 요트팀의 첫걸음이 될 테니까.
글: Edi
그림: Sams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