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한민국의 평균 여성으로 살면서 몸의 외형 때문에 시간적, 자본적 비용을 이미 치를 대로 치렀다. 뚱뚱한 몸도, 근육으로 다져진 멋진 몸도, 다이어트해서 마른 몸도 가져봤지만 내 가치를 몸의 겉껍질에 맡기는 건 단단한 반석이 아니라 흐물거리는 젤리 위에서 자기애라는 계란 한 바구니를 들고 불안정하게 서 있는 것임을 깨닫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구현경, '몸매'없는 세계의 운동, <몸의 말들> 중에서)
여성학자 정희진도 같은 책에서 '현대인 중에 몸 스트레스, 특히 체중과 바디 셰이프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거의 없다.'라고 언급했다. 나는 날씬한 몸을 목표로 운동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 조절을 하거나 유산소 운동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몸매에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목소리는 작아진다.
푹 빠져있었던 클라이밍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는 분명, 여성스러운 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이제야 고백한다. 클라이밍을 잘하려면 팔, 어깨, 등 근육을 단련시켜야 하는데, 내가 열심히 할수록 정직하게 커지는 등과 어깨 때문에 옷 사이즈가 하나둘씩 커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여성 라인'의 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차차 클라이밍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난 또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운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피부까지도 촌스럽게 그을리면서 말이다. 물에 반사되는 빛과 하얀 세일과 선체가 반사시키는 강렬한 태양을 온몸에 받는 요트 세일링. 몇 시간만 세일링을 하고 와도 피부는 금세 새까매진다. 까매지는 것까지도 괜찮은데, 자꾸 올라오는 기미는 감출 수도 지울 수도 없다. 잠깐 쉬려고 폰툰에 나와도 가림막 같은 것은 없다. 또 뙤약볕 아래에 벌러덩 누워서 쉬는 거다. 피부가 주로 선글라스 모양, 장갑 모양, 반소매 티셔츠 모양, 신발 모양으로 탄다.
요트를 탈 때는 세일에 받는 바람 때문에 배가 기울어지게 마련이고, 이때는 크루들이 체중을 이용해 배를 수평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렇게 보트의 발란스를 맞추는 것을 웨이트 시프트 weight shift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곳에서는 약하고 가벼운 크루보다는 빠른 몸놀림과 적합한 체중으로 힐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크루가 팀 역량에 도움이 된다.
아직도 ‘여자라면 165cm 키에 48kg 몸무게’라는 공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여기에는 없다.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세일을 올리고 내리고, 조절하는 동안 지치지 않는 체력과 폴을 번쩍 들고 옮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근력,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균형 감각이다.
"여자는 근육과 힘이지!" 라며 깔깔대는 20대 초반 크루들의 건강한 사고방식이, 그 나이 때 내가 몰랐던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들이 참 기특하고 예쁘다.
아래의 책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이은경,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2020)
강혜영 외, <몸의 말들> (2020)
박은지, <여자는 체력> (2019)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