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시작된 장마기간에 개최된 아시안컵 보령국제요트대회에 다녀왔다. 일기예보대로 오후가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바다 위에서 맞는 비는 도시에서의 것과는 다르게, 어느 장애물도 거치지 않고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합심하여 급격하게 체온을 빼앗아갔다. 얼른 가져간 세일링 재킷을 입었다.
작년 11월 경기를 대비해 구매했던 세일링 전용 복장을 그때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었다. 내가 참가했던 요트 경기가 원거리 항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근해에서 하는 경기였어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 비를 맞닥뜨리고서야 제대로 쓸모를 했다. 세일링 재킷을 입고 있는 상체는 완벽하게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어 한기를 느끼지 않았는데 문제는 반바지 차림의 다리였다. 비에 젖은 다리가 바람을 만나자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7월의 날씨가 이렇게 추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한여름에 그런 옷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작년 가을, 김포에 있는 마리나에서만 훈련을 하다가 바다로 시합을 나가게 되었을 때 우리 팀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전용 세일링 복장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신입 멤버들은 세일링복이 없기도 했고 , 팀복을 다시 한번 제작할 때가 되기도 해서였다. 전용 세일링복이란 고어텍스 소재로 만들어져서 가벼우면서도 보온, 방수가 되는 오프쇼어용 멜빵바지와 재킷이다. 흔히 바다에는 여름과 겨울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었다가 갑자기 날씨가 궂어져 비라도 내리거나 밤이 되면 겨울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를 타는 사람들은 여름에도 고어텍스 바지와 재킷을 챙겨 나간다.
처음 구매하는 세일링복은 전문 스키복만큼이나 비쌌다. 요트 인구가 워낙 적으니 수요가 적고, 그만큼 공급업체가 적어서 가격이 비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번에 비바람을 경험해보니 기능이 매우 탁월해서 그 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다 항해를 정말로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S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 시합에도 해상에 상하의를 모두 챙겨 나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옷을 꺼내 입어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분명 우리는 이 옷을 함께 팀복으로 구매했는데 이번에 처음 입은 나와는 달리 그녀는 벌써 100일도 넘게 입었다고 했다.
“이 옷 하나면 다 해결돼. 사계절 범용이야. 나는 지난주에도 바다에서 잘 입었는걸. 한여름에도 새벽, 아침 시간에는 필수고, 낮이라도 흐리고 비 올 때는 꼭 필요해. 바람이 많은 날도 그렇고.”
그녀는 아예 바다 위에서 여름을 잊으라고까지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참가했던 늦여름 항해 중에 비가 쏟아졌는데, 챙겨갔던 일반 비옷은 비는 잘 막아줬지만 계속 비를 맞다 보니 체온이 내려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고 했다. 그 후에 세일링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단단히 준비하고 간 눈 내리는 겨울날의 세일링은 완벽했다고 했다. 세일링 재킷 안감에 은색으로 된 소재가 체온을 빼앗기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에는 요트대회가 하나 둘 개최되기 시작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팀복을 다시 맞춰야 할 핑계가 생겼다. 이번에는 여름옷 말이다. 언제나처럼 공평하게 투표로 결정을 한다.
1. 기능성 소재 반팔 티로 뒷면이 망사 소재인 시스루 스타일
2. 무채색의 세일링 피케셔츠
3. 형광색의 일반 피케셔츠
4. 기능성 긴팔 요가복 (몸에 밀착되는 스타일)
다들 털털한 성격의 여자들이라 무채색의 피케셔츠가 압도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뒷면이 망사로 된 옷이 1위였다. 어랏? 다들 섹시한 옷을 입고 요트를 타고 싶었던 것인가? 이제 요트계에도 요가계나 패션계처럼 시스루나 크롭티 유행이 오는 것인가?
결국 토론을 거쳐 세일링 셔츠를 선정했고 우리 팀 로고도 깔끔하게 박았다. 이번에는 딱 로고만이었다. 로고'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몇 년 전에 맞췄던 팀복에 풍성하게 붙은 스폰서 로고들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팀에 들어왔을 때 받은 팀 회칙에는 스폰서십을 받지 않겠다는 항이 있었다. 그것이 참 의아해서 물어봤다.
“스폰서십은 왜 금지하는 거예요? 후원받아서 새 세일을 살 수 있으면 지금처럼 찢어진 세일을 기워서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팀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죠. 고고한 척하려고 거절하는 것은 아니에요.”
나중에 들어보니 적극적으로 스폰서십 유치를 원하는 멤버도 있었던 반면, 프로팀이 아닌 아마추어 요트팀에서 스폰서를 받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되었던 멤버들이 있었다고 했다. 스폰서십을 받는 과정에서 우리 팀이 프로팀인 것처럼 홍보하는 방식이 불편했던 사람도 있었고 말이다. 그들은 그냥 순수하게 세일링을 좋아하고 요트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몇 번 안 되는 요트 경기에 참가해 살펴보니 요트는 다른 스포츠에 비하면 스폰서십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다못해 스포츠도 아닌 요가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를 떠올려봐도 천지차이이다. 요가에는 선수라는 개념도, 대회라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페스티벌이 그나마 큰 행사인데, 한 번 행사에 참여하면 에코백 두세 개를 가득 채워 선물을 받아올 정도였다. 요가복부터 시작해서 다이어트 건강 관련 식품, 의약품, 아로마테라피용품, 화장품, 요가원의 수강권, 명상 관련 상품 등 뷰티, 건강, 라이프스타일 관련 스폰서가 매우 많았다.
이는 당연히 시장의 크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트 인구는 굉장히 적고, 대회에 참가하는 숫자는 더 적으며, 하다못해 나만해도 올림픽 종목인 것을 최근에 알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요트 경기에 대기업의 스폰서십이 붙지 않는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소수층의 전유물인 럭셔리 스포츠란 고정관념으로, 요트 경기를 후원하는 것이 대기업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같은 기업의 유럽, 미주 법인이 현지 요트 대회 후원을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인식 변화의 시작은 대중화일 것이다. 그나마 요즘 실내보다는 야외활동을 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비교적 적합한 레저인 요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긴 한다. 저변이 넓어지고 대중화가 되어 시장이 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P.S. 스폰서십을 받지 않겠다는 회칙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스폰서십 환영!
글: Edi (https://instagram.com/edihealer)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