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바다 항해라 덜 긴장했고, 더 익숙하게 짐을 챙겼다. 마리나까지 가는 길을 체크해서 아침에 나갈 시간을 정하고, 8월의 항해가 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며 수영할 준비, 갈아입을 옷과 수건, 혹시 비가 올지도 모르니 비옷도 챙겼다.
이번 크루징의 막내 A는 20살 때부터 대학 요트부에서 요트를 배우기 시작해서 이미 세일링 경력 10년 차이다. 국가대표 요트팀의 전지훈련에 스태프로 참여해 한 달씩 함께 지내지를 않나, 우리 팀의 주 1회 훈련 외에 별도로 다른 팀의 연습도 나가지를 않나, 참 에너지가 넘친다. 나도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것으로는 어디 뒤지지 않는데, A는 못 따라가겠다. 믿고 의지하는 캡틴 스키퍼 언니가 참여하지 않는 이번 크루징을 망설이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동행을 권유하던 용감한 친구이다.
“언니, 우리가 챙겨야 해요. 제가 남자들이랑 숱하게 크루징 나가봤잖아요, 라면만 먹다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언니들이랑 세일링 할 때처럼 과일, 샐러드, 샌드위치 이런 거 없어요!”
그래서 과일, 옥수수, 과자도 챙겼다.
이번 크루징은 선장님을 중심으로 총 8명이 모였는데, 여자 3명, 남자 2명, 외국인 남자 3명의 신기한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여자 3명은 우리 세일링팀 팀원들이고, 남자 2명은 선장님과 오랜 시간 세일링을 하신 베테랑 한 분이셨다. 외국인 남자 3명은 몇 년째 한국에 거주하는 분들이었는데, 터키에서부터 세일링을 즐기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터키에서는 주말에 요트를 타고 그리스까지, 혹은 두 나라 사이의 섬들을 크루징으로 돌고 오는 것이 흔하다고 했다. 지중해의 섬들, 상상만 해도 멋지다.
크루들 소개를 듣고 있자니 불현듯 ‘그러고 보니 내 생애 첫 크루징은 터키에서였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20대 초반에 큰 배낭을 메고 한 달간 터키 일주를 했었다. 내가 느낀 터키의 매력 중 하나는 서부와 동부의 현격한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서부를 여행할 때는 터키가 유럽이라 생각했었다.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란과 이라크를 접하고 있는 동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엄격한 중동의 느낌이었다. 그래서 서부의 해변에서 비키니, 심지어 톱리스를 하고 있는 여자들을 보다가 동부의 히잡과 차도르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녀들을 봤을 때, 그리고 그런 여성들을 대하는 남성들의 태도 차이는 당시 꽤 큰 문화적 충격이었었다.
내가 크루징(크루징이라기보다는 보트 투어가 맞는 표현이긴 하다)을 했던 곳은 물론 서부였고, 페티예라는 항구도시에서 출발해 에게해의 여러 섬들에 들르는 코스였다. 크루징 중 바다 한가운데 배를 세우면 자연스럽게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하거나 스노클링을 했었고, 갑판 위로 올라와서는 태닝을 하거나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셨었다. 물을 좋아하는 나는 모르는 외국인들과도 잘 어울려 바다에서 재밌게 놀았는데, 수영을 못해서 혼자 우두커니 보트를 지키며 내 사진만 왕창 찍어주던 친구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생존을 위해서도 아니고, 밥벌이를 위해서도 아닌, 잘 노는 삶을 위해서는 수영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 덕이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의 세일링은 잊고 있던 십수 년 전의 그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8월의 내리쬐는 햇살과 뜨거운 공기, 거의 불지 않는 바람과 잔잔한 바다는 우리를 바다로 뛰어들게 했다. 작열하는 태양을 뒤로하고 뛰어든 바다의 청량감과 시원함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한 여름밤에 야외에서 살얼음이 낀 맥주를 마시는 기분의 백배! (이건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다.)
다이빙 연습을 한다고 몇 번이나 요트에서 점프를 반복했고, 다이빙 폼 콘테스트를 하며 신이 났다. 새로 산 구명환을 테스트할 겸 바다로 던져 올라타 보기도 하고, 잠수 시합도 했다.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채로 바비큐를 굽고, 이태원에서 공수해온 빵들과 햄, 치즈, 토마토, 후무스, 샐러드, 과일들까지 근사하게 차려놓고 맥주와 와인 파티가 벌어졌다. (당연히 술을 안 마신 요트면허 소지자가 운전을 했다.) 신나는 음악은 선장님도 춤추게 했다.
"You are all invited to Bodrum and Istanbul for Sailing!"
흥이 오른 R이 말했다. 최근에 바꾼 그의 요트 무디 54(Moody 54 DS)의 보드룸 세일링 영상을 보여줬는데, 어! 영상을 보니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 풍경,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그 코발트색 바다였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새파란 바다 색을 보고 있노라니, 당장 갈 수 있는 곳도 아닌데 괜히 설레었다. 영상 속의 Moody 54는 숫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54피트(약 17m) 길이의 선체를 갖고 있는 크고 럭셔리한 요트였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살펴보자면, 지난번과 이번에 탔던 요트들은 모두 43이라는 숫자를 붙이고 있는 43피트짜리 요트로 미드사이즈 크루저로 분류한다. 외부에 세일, 윈치 등은 물론이고 내부에 캐빈(침대), 화장실, 테이블, 주방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번 세일링에 탔던 할버그 라시 43 (Hallberg Rassy 43)은 만들어진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 인테리어가 좀 낡아 보일 수는 있지만 딜레이 없이 반응하는 러더나 장착된 세일 등에서 보이듯이 퍼포먼스가 매우 뛰어난 요트라고 했다. 반면 오늘 탔던 베네토 43 (Beneteau 43)은 7~8년밖에 안 된 비교적 새 요트인데 레저용으로 적합하게 디자인된, 그래서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마감도 깔끔한 요트였다. (캡틴 언니, 그래서 저희가 레저를 하고 왔습니다!)
오늘의 이 요트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가장 근접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호화 요트도 요트이고, 내가 매주 손가락마다 물집이 잡히도록 훈련하는 J24도 요트이고, 물에 빠지고 팔다리에 멍이 들면서 타는 1인용 딩기도 요트이다. 물론 오늘처럼 이렇게 바다에 나와서 즐겁게 놀 수 있는 크루저도 그렇다.
같은 삶의 태도와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을 칭할 때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글: Edi
그림: Sams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