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푸가 안 맞나 보지 뭐. 샴푸 바꿨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야.”
“아니야, 이거 한 달 전보다 더 심한데? 이건 피부과 가야 해. 그러다가 머리 싹 빠질 수도 있어.”
“그래? 탈모는 안 될 일이지!”
한두 달 전부터 두피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뒤통수 목덜미 부분인데, 친구가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일러주고 나서야 피부과에 갔다. 병원에서는 두피염이라 약 바르면 금방 낫는다고 했다. 그런데 약을 바르고 싹 낫는가 싶더니 얼마 후 두피가 간지럽고 아프고 콕콕 찌르고 난리가 났다. 두피염에 더해 모낭염까지 생긴 것이라 했다. 그래서 지금은 몹시 센 피부과 약, 각종 항생제와 부신피질 호르몬을 여러 알 먹고 있고, 의사 선생님은 두 달 정도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다음 날에는 입술이 터졌다. 이건 또 뭐야? 이것은 구순포진이라고 했다. 그 이틀 후에는 흰머리를 두 가닥 발견했다. 요새는 5살 어린 애도 새치가 난다던데, 내 나이에 흰머리 나는 게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나는 새치 하나 없는 여자로서 어마어마하게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주일에 3~4번 꼬박꼬박 요가를 하고, 건강한 과일과 야채로 아침도 야무지게 챙겨 먹으며(물론 버터를 듬뿍 바른 빵도 먹지만 흐흐), 스트레스도 잘 다스릴 줄 아는, 그러니까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상적인 형상에 스스로를 끼워 넣고 뿌듯해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화장실을 못 간지도 며칠이 되었잖아. 내 장도 기능을 멈췄나보군.
그런 내가 몸이 보내는 아우성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까 나는 스트레스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앞에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스트레스 따위는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처럼 주문을 걸면서 버티던 사람으로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나 지금 피곤하고, 쉬고 싶어.’라고.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10시간을 내리 잤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인요가 수업을 다녀왔다. 나는 99% 순도의 양적인 사람이라서 인요가를 거의 하지 않지만, 어쩌면 기피하지만, 지금은 인요가를 해야만 할 시간이었다.
약 10분간 선생님은 오늘 수업의 화두를 던지는 말씀을 하셨고, 그다음 10분간은 명상이 이어졌다. 몸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엉망인 나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생각한 건 빨리 몸 움직이고 깊은 사바아사나로 쉬다가 가는 것인데, 머리 복잡하게 무슨 책 글귀를 저렇게 길게 읽어주시나. 나같이 머리 복잡한 사람은 머리를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고 싶다고!’
이어진 슬로우 플로우는 정말 느렸다. 너무 느려서 힘들고 짜증이 올라왔다. 내 스타일로 했다면 한 호흡에 한 플로우로 엮어서 춤처럼, 무용처럼 흐르듯이 끝냈을 고작 몇 가지의 아사나를 근육, 신경 하나하나를 느껴보라고 하셨다. 한 다리를 들어 올리는데 느릿느릿 1분, 호흡 5번, 이러니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언제나 후다닥 빠르게 해치우는 것은 쉽다. 문제는 느리게 뜯어보고 들여다보고 느끼는 게 힘들고 괴로운 법이다.
이런 뒤죽박죽 한 생각을 가지고 복잡한 머리로 기본적인 동작으로 이어진 익숙한 플로우를 하다 보니, 한 시간도 넘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순간 이동을 했나 싶었고, 블랙아웃이 있었던 것처럼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다음 타임라인에 와 있는 듯했다. 그다음에는 내가 원하던 인요가가 시작되었다. 아주 편안하고 쉽고 깊은 휴식을 할 수 있는 아사나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수간 힘이 찾아올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나를 둘러싼 외부의 환경과 상황은 언제나 변한다. 그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소관이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역량을 더 키워내야 하는지겠지.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하루에 10시간씩 자고 난 월요일 아침. 구순포진은 사라졌고 아직 약을 먹는 중이지만 두피 간지러움도 많이 가라앉았다. 다행이다, 연휴를 오롯이 나를 위해 보낼 수 있어서. 그리고 휴일이 아직 절반 남게 남아있어서.
https://youtu.be/a-S32STwRp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