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멀미의 신세계를 보여주지
요트를 타면서 가보게 된 국내의 마리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울 마리나, 김포의 아라마리나, 인천의 왕산마리나, 그리고 멀리는 부안 격포항, 새만금항, 통영항이다. 그런데 이번에 간 부산은 그곳들과는 또 다른 곳이었다.
통영, 부안, 새만금만 해도 요트를 타기 위해 먼바다에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바다의 냄새, 큰 수산시장, 작은 횟집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그랬다. 하지만 부산은 뭔가 달랐다. 분명히 엄청 큰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요트를 타는 것은 같았는데, 고개를 돌리면 화려한 고층 빌딩과 번쩍번쩍 빛나는 아파트가 보였다. 회에 소주보다는 샴페인에 석화가 어울릴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물론 도시 속의 마리나가 부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의도에 있는 서울 마리나야말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에 위치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곳은 바다가 아닌 강이고, 건너편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거리이며, 더구나 나로서는 매일 두 번씩 건너 출퇴근을 하는 곳이니,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부산은 내가 처음 요트라는 것을 타본 곳이다. 여름휴가로 부산에 내려갔다가 하루에 만 원씩 주말 동안 이만 원을 내면 요트를 가르쳐준다기에 부산 요트학교에서 요트를 배웠었다. 부산을 4년 만에 다시 찾았는데, 이번에도 나의 부산여행의 목적은 요트였다. 요트학교 수료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그곳에 이번에는 부산 슈퍼컵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왔다.
그동안 부산 슈퍼컵은 30피트 이상 요트를 위한 경기만 있었기에 24피트의 작은 요트 J24는 참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2022년에 ORC 스포츠라는 카테고리가 신설되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들어서니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세일을 당겼을 때 갑자기 바람을 받아서 요트가 앞으로 주욱 나가던 느낌, 해운대 센텀시티의 번쩍번쩍한 건물을 배경으로 선생님이 사진을 찍어주시던 장면, 그리고 그 멋진 풍경에 반해 요트를 더 타봐야겠다고 결심하던 순간까지.
그때는 안보였지만 지금은 보이는 차이점으로는 이런 것들도 있었다. 다른 바다에서는 생업을 위한 어선이나 어망을 피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부산에서는 관광을 위해 출항한 카타마란을 피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예쁘게 멋지게 차려입은 연인, 사진 촬영 삼매경인 친구들을 가득 태운 럭셔리 요트 말이다.
“광안대교? 부산 여행 올 때마다 멋진 배경으로 사진 찍었던 그 광안대교?”
저 멀리서 사진의 배경으로만 보던 광안대교까지가 우리 경기수역이라니, 정말 멋진걸!
부산이 다른 바다와 달랐던 것은 세련된 도시의 풍경과 럭셔리한 요트만은 아니었다. 처음 바다에 나가본 것도 아니고 나름 요트 3년 차인데, 이렇게 큰 너울은 처음 봤다.
우리의 요트는 비교적 작은 사이즈였기에, 배에 앉아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큰 너울이 마치 높은 물기둥, 혹은 벽처럼 보였다. 한 번의 출렁임 이후에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높이 오르면, 오른쪽에 있던 물기둥, 물벽이 가라앉는다. 그러고 나면 안보이던 다른 배가 딱 나타나는 것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보통의 경우 배들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녀 부딪히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못 보고 있던 배가 이쪽으로 온다면 부딪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겁이 났다.
그런데 너울이 주는 공포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멀미에 비하면. 첫 바다 세일링을 나온 신입 멤버는 바로 구토를 했고, 그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쳐 속을 모두 비워내고 나서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토를 하지 않더라도 속이 뒤집힌 것은 마찬가지여서 긴장감 넘치는 대회 중에도 하나둘씩 정신줄을 놓고야 말았다. 경기 중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크루들은 그 좁은 요트에 하나 둘 자리를 찾아 등을 대고 눕기 시작했다. 이미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와있는 상황에, 경기가 종료되지 않았는데 돌아갈 수는 없으니, 눈이라도 붙이면 좀 나을까 해서였다.
. 우리가 느꼈던 너울은 전날의 강한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전날인 대회 첫날은 경기를 못했었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졌고 바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개회식을 마치고 풍랑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대기, 대기, 대기, 그리고 결국 경기 취소.
평소에 비교적 안전하고도 안정적인 김포 수역에서만 연습을 하던 우리는 첫 부산 경기를 하며 뱃멀미로 호된 신고식을 했다. 평소 우리는 요트경기를 갈 때마다 맛 집을 찾아다니느라 식사 스케줄이 빡빡한 팀인데, 아무도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스키퍼 언니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말없이 묵은지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요트팀 스키퍼는 요트 운전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엄마손 맛 찌개까지 끓여준다는 사실! 이것이야 말로 독일 메르켈 총리에 버금가는 진정한 어머니 리더십이 아닌가.
아,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이번 대회 때 맛집 탐방을 못한 것은 아니다. 경기가 취소된 첫날 부산의 핫플레이스 아난티 코브에서 로마의 3대 카페라는 산 에우스타키오의 에스프레소도 맛봤고, 오징어회, 물회, 60년 전통 할머니 소고기 국밥, 꼬막정식까지, 먹을 만큼 먹었다.
아무튼 김치찌개를 먹고 힘을 낸 우리는 마지막 날 500원짜리 멀미약을 한병씩 들이키고, 두 경기에서 각각 2등,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최종 4위로 경기를 마쳤다. 정말 다이내믹한 부산 요트 대회이자 요트 여행이었다.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