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요트 타시는 모습 사진도 찍고요.”
“아 인터뷰는 좋은데, 제가 요트를 김포에서 타서요. 김포까지 오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리고 제가 개인 요트가 없어서,..... 팀원들과 함께 타려면 주말 밖에 시간이 안 되는데 어쩌죠?”
누가 직장인 아니랄까 봐, 기자와 사진작가가 나 때문에 주말근무라도 할까 봐 처음 통화하는 사람을 붙들고 남 걱정을 먼저 했었다.
처음 연락이 왔던 때는 2월, 아직 2023년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이었기에 실제로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4월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국민체육진흥공단 매거진에 인터뷰가 실렸다.
요트라는 스포츠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강렬한 태양을 받는 새하얀 요트 위의 블링블링한 모습의 매력적인 사진을 찍을 계획이었으나, 흐린 날씨 때문에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게다가 4월 초의 날씨는 여전히 추워서 겨울에 입는 방풍 방수의 시꺼먼 기능성 세일링 재킷을 입어야만 했다. 심지어 바람까지 너무나 센 날이어서 요트가 강풍에 자꾸만 기울어졌다. 사진작가님께 요트가 좁고 위험하니 카메라 한 개만 목에 잘 걸고 타시라고 했는데 조명에, 각종 사이즈의 렌즈가 든 무거운 가방에, 카메라에 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 여자 다섯 명이 물병 하나씩만 들고 탄 것과 비교되게 말이다. 우리 팀원들은 저 비싼 렌즈가 깨지거나, 렌즈가방이 물에 빠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 평소에 타던 대로 세일링을 하지 못하고 최적의 코스는 잊고, 요트가 기울어지지 않게 안전하고도 또 안전한 세일링만 했다.
매거진에는 짧게 실렸지만 실은 인터뷰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 삼십 대 후반, 나이 앞에서 운동을 망설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스키, 스노보드 등을 즐기셨다고요. 어릴 적 지연 님의 운동 라이프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 활동적이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분이셨어요. 여름에는 주말마다 조정을 하러 나가셨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다니셨어요. 아빠와 저는 스키 파트너였어요. 겨울이면 아빠가 초등학교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수업이 끝난 저를 태워 바로 스키장에 데려가셨고요, 함께 야간 스키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어요. 아빠께서 스키장에서 사주시던 츄러스와 휴게소 우동은 행복한 추억이에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20살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골프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아빠와 함께 라운딩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엄마는 수영을 잘하셔서 엄마 따라 수영장에 다니다가 초등부 대회에 나가기도 했는데요, 서울시장 배 마스터즈수영대회, 전국학생휜수영선수권대회에서 딴 금메달과 동메달을 아직도 보물처럼 갖고 있어요.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적극적으로 도전하되 인생을 충분히 즐기는 태도가 지금 저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고 풍족하게 만들고 있는지 몰라요. 새삼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40대의 문턱에서 바라본 스스로의 모습과 20대 혈기왕성한 친구들의 모습 간의 간극이 멀게만 느껴졌다고요. ‘나이’라는 벽 앞에서 어떤 마음속 갈등이 일었는지 궁금합니다
20대에는 학점 올리고, 자격증 따고, 어학연수 다녀오고, 또 어학 점수 만드느라, 그리고 30대에는 직장에서 자리 잡느라 부지런히 살았어요. 30대 후반이 되니 이제 삶이 조금은 안정된 듯 느껴졌고, 취미생활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겨서 서핑, 클라이밍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이 제 나이를 들으면 깜짝 놀라며 갑자기 어려워하더라고요. 제가 평균연령보다 5~10살 정도 많았거든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 나이면 애 엄마나 아줌마여야 하는데, 이렇게 함께 즐기는 모습이 익숙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억울했죠. 난 20대에 그런 여유가 없었고 이제야 기회가 생겼는데 안 끼워준다니 서운한 거예요. 난 아직 젊고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데 말이에요. 적극적으로 즐기고 싶다는 마음과 나이에 걸맞게 점잖게 있어야 한다는 억압 사이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 그러던 중 요트가 눈에 들어오게 된 계기. 왜 ‘요트’였나요?
요트는 부산 여행 중에 처음 타게 되었어요. 액티비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여름휴가 이벤트로 요트 체험을 골랐던 거죠. 그런데 요즘 많이 하는 선셋크루징, 그러니까 예쁜 드레스 입고 와인잔 들고 타는 요트는 아니었고요, 구명조끼 입고 웻슈트 입고 타는 스포츠로서의 1인용 요트였어요.
- 요트에 처음 올라탔을 때는 어땠나요. 분위기, 기분 등 요트와의 첫 만남
초등학교 때 수영선수를 하기도 했고, 워낙 물을 좋아하니 자신만만하게 요트에 올랐는데 양손으로 세일(돛)을 조절하고 방향키를 조종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예요. 감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다가 코치님이 알려주신 대로 따라 했더니 세일이 바람을 제대로 받아 요트가 쑤욱 전진을 하는데 너무나 신이 나고 재미있더라고요.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나가는 느낌, 스키를 타고 활강하는 느낌, 혹은 오픈카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어요. 쨍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시원하게 바다를 가르며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 요트를 배우랴, 처음 하는 동호회 활동에 적응하랴, 회원들에게 꼰대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도 노력을 했다고요.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수강료를 내고 배우는 수업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이 없었을 텐데 기존 팀에 신입회원으로 합류를 하다 보니 나 때문에 팀세일링에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컸습니다. 빨리 익혀서 제대로 한 크루의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그 와중에 나이까지 많다 보니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저 스스로 ‘나는 나이가 많아서 힘이 없어’, ‘내 나이에는 반응 속도가 느려’ 이런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더 열심히 평일에는 체력단련하고, 주말에는 빠지지 않고 정기 훈련에 참여하고, 요트에서는 먼저 움직이고 더 많이 움직였어요. 제 장점 중 하나가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나 역시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다행히 꼰대 소리는 안 하고 팀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ㅎㅎㅎ
- 현재 팀으로 활동 중이라고요. 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팀명, 팀원수, 강점, 특이점 등)
제가 활동하고 있는 팀은 여성 아마추어 요트팀 ‘팀레이디스’입니다. 2015년에 창립되어 현재 10여 명이 활동하고 있고, 여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종 요트대회에서 항상 순위권에 오르고 있습니다. (크루즈요트대회는 남자부, 여자부 구분이 없답니다.) 9월에는 국내 요트팀 최초로 Manhattan Yacht Club의 초청을 받아 New York Harbor에서 열리는 Lady Liberty Regatta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1989년에 시작된 대회로 전 세계 여성 세일러들의 꿈같은 대회예요. 자유의 여신상 바로 앞에서 요트를 타는 정말 특별한 기회거든요.
- 요트를 타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는 요트, 그러니까 침대, 부엌 등을 갖추고 있는 큰 요트를 타고 굴업도 항해를 간 적이 있어요. 지형지물 없이 끝없이 바다만 펼쳐지는 곳에서 지도를 보며 바람과 조류를 계산해 요트를 조종하는 것도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그보다 굴업도 조망이 잘 보이는 바다에 정박해서 선상 바비큐를 즐겼던 것이 정말 특별했어요. 돌아오는 길에는 바다 한가운데에 요트를 세워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즐기기도 했고요. 코로나 기간 동안 저희 팀은 실외스포츠를,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비교적 안전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 요트 타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이 맛에 요트 탄다.’ 하는 점이 있다면요?
요트는 사계절 탈 수 있지만, 겨울에는 바람이 차니 쉬는 편이에요. 그리고 봄부터 다시 세일링을 시작하죠. 봄에는 바람이 적당이 세고 햇볕이 따뜻해서 요트 타기 좋고요, 여름에 타는 요트는 휴가지 분위기를 내게 해줘요. 요트를 타다가 물에 빠져도 바다에서 수영하는 기분이 드니까요. 너무 더우면 일부러 물속에 뛰어들기도 하고요. 가을에는 깨끗한 바람이 선선히 불어서 세일링 하기 딱 좋고요. 아, 한여름 밤에 요트 위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 한잔도 무척 시원하답니다.
- 반면 힘들었던 점이 있었다면요. 극복과정도 함께 알려주세요.
저는 세일을 조절해서 배의 속도를 컨트롤하는 트리머를 맡고 있는데요, 시트라고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조절을 합니다. 힘쓰는 법을 잘 몰라 처음에는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잡히고 살갗이 터지고, 손가락은 관절염 걸린 것처럼 마디마디가 퉁퉁 부었었어요. 팔과 등 근육통에도 시달렸고요. 훈련만 끝나면 손가락, 등, 목 할 것 없이 파스를 붙이고 다녔으니까요. 지금은 근력도 세지고 요령도 생겨서 이렇게 에피소드처럼 말할 수 있네요.
- ‘요트’를 할 때에는 어떤 자질 또는 운동 능력이 필요한가요?
다른 운동과 마찬가지로 근력, 유연성, 지구력, 균형감각 등이 골고루 필요합니다. 제가 타는 크루즈요트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4~6명이 함께 타는 요트이다 보니 팀워크가 추가적으로 필요합니다. 의사소통능력, 협동심, 배려, 양보, 신뢰, 협조 같은 것들이요.
- 운동능력뿐만 아니라 ‘경험’도 중요하다고요. 어떤 경험들이 중요한지요.
요트는 엔진 같은 동력장치 없이 바람의 힘으로 세일(돛)을 조절해서 움직이는 스포츠이다 보니, 선수의 근력, 지구력 같은 신체적 역량 못지않게 바람과 조류의 방향과 세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규격화된 경기장 없이 해상 위에 마크를 띄워놓고 경기를 하기 때문에 경기규칙이 세세하게 확립되어 있어서 이를 숙지해야 합니다. 바람과 조류, 그리고 규칙을 고려하여 스스로 보이지 않는 코스를 선정하고 요트를 조종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세일러의 역량을 꼽을 때 신체적 능력만큼이나 지적 능력과 경험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요트 세일링의 매력이기도 해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는 점이요.
- ‘나이’뿐만 아니라 ‘성별’의 벽을 뛰어넘어 요트 대회에서 입상도 하셨습니다. 처음 요트 도전을 망설이던 때도 떠올랐을 것 같아요. 기분이 어떤가요.
국내 요트인구의 90%, 아니 95% 이상이 남성이다 보니 여자로서 요트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개인 요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여성 요트팀을 찾고 나니 그다음에는 제 나이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요트는 나이와 성별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습니다. 그때 멈췄다면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이 있는 걸 모르고 살았을 것 아니에요?
- 나이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요.
27살 대학원생 시절에 22살 학부생과 함께 해외연수를 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너는 참 좋겠다. 유학도 갈 수 있고, 고시를 시작할 수도 있고. 난 이제 선택지가 없어.”라는 말을 했고 22살 후배가 100세 인생시계를 보여주며 지금 제가 새벽 6시에 있다고 말해줬었던 게 기억나요.
27살의 저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42살의 저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것 같아요. 몸은 건강하고 정신은 명료하고,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고 일어났더니 딱히 두려운 것도 없고요.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저처럼 현재의 나이로 미래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120세까지 산다고 하잖아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살 날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걸 잊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지금 내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 바로 내 미래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