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코리아 레이저 챔피언십
“이번에 양양 가지?”
“못 가요. 전 요트가 없잖아요.”
“그럼 차터 해서 가야지, 같이 가자.”
나는 작년 레이저챔피언십 레디얼(ILCA6) 3등 수상자이다. 하지만 개인요트는 없다. 작년에는 대회 측에서 요트를 빌릴 수가 있었는데, 올해는 차터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트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나로서는 당연히 대회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작년 양양대회 이후로 딩기요트를 단 한 번도 타지 않았던 터라 꼭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요트학교에 딩기요트가 몇 대 있기는 하지만 여자가 타는 ILCA6, 레디얼 세일은 부족하다. 여자 요트인구가 많지 않으니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대회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는데,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세일과 요트를 구해서 양양에 함께 가게 되었다.
나는 작년에 3등을 하긴 했으나, 순전히 운이 좋았었다. 거친 파도와 센 바람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중도 탈락하고 완주를 하지 못했을 때, 나는 파도와 바람을 버텼다. 경기실력이라기보다는 체력과 힘 덕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매뉴얼에 의하면 ILCA6의 적정 크루 몸무게는 55kg에서 70kg이며, 보통은 65kg를 꼽는다. 내 키나 몸무게가 요트에 적합했던 덕을 본 것이다. 그런데 내가 3등을 한 것이 많은 세일러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나 보다. 우리 요트학교의 동호인들이 작년보다 더 많이 대회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저런 초보도 입상을 하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고나 할까. 나도 모르게 나는 세일러들의 희망이 된 듯했다.
“어어어! 내 윈디게이터! 떨어지면 안 돼! 주워주세요!”
“떨어졌어요.”
경기 시작 전 해상에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오던 요트의 붐이 정지해 있던 내 요트의 마스트를 치고 지나가면서 메인시트가 마스트에 붙어있던 윈디게이터를 쓸고 가서는 물에 톡 빠뜨렸다. 윈디게이터, 정확히는 윈드 인디게이터 wind indicator , 혹은 윈덱스 Windex라는 브랜드명으로 부르는 이 도구는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가리켜 준다. 세일러들은 그 화살표 끝을 보면서 바람이 오는 방향을 인지하고, 요트의 세일과의 각도를 계산해서 코스를 잡아 범주 한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려주는 화살표가 없다. ‘바람을 보는 눈’이 사라졌다.
‘뭐지? 저러고 그냥 간다고? 사과 한 마디 없이?‘
‘왜 미안하다고 안 하지? 나보다 요트도 잘 타 보이던데 일부러 저런 거 아니야?‘
‘지금 나 견제하는 건가? 내가 작년 ILCA6 클래스 3위, 그중에서도 여자 1위라고(작년 1,2등은 남자였음) 처음부터 내 발을 묶어버리겠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는 갑자기 억울한 피해자로 과몰입했다. 나도 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진 것은 사실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윈디게이터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경기가 끝나면 빌린 사람한테 돌려줘야 하는데, 아니 이제는 내 돈으로 물어주게 생겼는데, 어떻게 저렇게 피해를 끼치고 사과 한마디 없이 휙 가버릴 수 있는 건지.
‘바람을 보는 눈’을 물에 빠뜨린 나는 졸지에 장님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냥 드넓은 바다에 동동 떠있기만 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 해는 작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작년에는 파도가 세고 너울이 심한 데다가 바람까지 강해서 바다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경기를 마치는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다. 반면 올해는 파도와 너울이 전혀 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상태의 바다에 바람까지 약했다. 심지어 1라운드 경기 중간에는 바람이 멈춰서 배들이 가만히 떠 있기도 했다. 요트는 멈춰버렸고, 바람은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바람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던 윈디게이터는 없어졌고. 망연자실 바다 위에 떠있을 때, 갑자기 다른 요트들이 세일을 당기더니 움직이는 게 아닌가? 세일의 모양을 바꿨다는 것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나만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못 보고 있었다. 아, 내 윈디게이터 돌려줘! 돌려달라고!
“아니 이렇게 택킹을 잘하시는 분이 왜 그렇게 바람을 못 읽어요?”
‘제가 지금 눈이 없어졌답니다...... 저도 참 답답하네요……’
1라운드의 마지막 마크를 꼴찌로 돌던 나는 이미 제한시간을 초과하여 DNF(Did Not Finish: Started but did not finish the race)로 실격이었다. DNF는 전체 출전자의 마지막 등수+1점을 가져가는 것이니 17점 확정. (요트경기에서는 점수가 낮을수록 좋음) 어쨌든 출발선까지는 돌아가야 다음 2라운드 경기를 시작하는데 꼴찌인 내가 돌아가지 못해 다음 라운드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마크에 대기하고 있던 경기운영정에 계신 코치님께서 나를 빨리 출발선까지 돌려보내기 위해 도와주셨다. 코칭을 따라 하니 멈춰있던 내 요트가 바로 바람을 받아 전진하는 게 아닌가? 이 코치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윈디게이터 하나 없다고 내가 이 정도로 바람을 못 읽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남 탓만 하고 있잖아!
2라운드에서는 흩어진 마음을 챙기고, 놓쳤던 정신줄을 부여잡고 경기에 임했다. 스타트를 하고 나서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앞에 태극기가 보였다. 세일에 태극기가 붙었다는 것은 국가대표를 의미한다. 우와, 국가대표 강승현 선수가 바로 내 앞에 있다니! 그래, 눈이 없어졌으니 안경을 끼면 되겠구나. 국가대표 안경. 그때부터 국가대표 선수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했다. 방향을 전환하면 나도 전환했고, 세일을 조절하면 나도 따라 조절했다. 오, 이건 윈디게이터보다 더 좋은 눈이잖아? 하지만 기쁨도 잠시, 국가대표 선수는 어느새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 선수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눈도 없는데, 안경도 없어졌으니 이제 망했구나.’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을 때 내 눈에 보이는 핑크색 실 한 가닥!
‘이 요트는 텔테일이 핑크색이네. 참 예쁘다. 오? 텔테일?’
텔테일 Telltales 은 단어 뜻 그대로 나에게 말을 해준다. 바람에 대해서 말이다. 털실 같은 소재를 세일 양쪽에 한 가닥씩 붙여 놓으면 이 실이 날리는 모양으로 요트가 바람을 잘 가르며 달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텔테일이라는 바람을 읽는 눈이 한 개 더 있었던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심정으로 텔테일을 보며 2라운드 경기를 했다. 결과는 5등! 1,2,3등은 국가대표를 포함한 전문선수, 4등은 요트경력 25년 이상의 우리 팀 스키퍼 언니였으니, 이건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성적이었다. 매우 만족스러웠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비록 바람을 보는 눈은 바다에 빠뜨렸으나, 더 이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고 마지막 경기까지 총 5라운드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작년과 동일하게 ILCA6 클래스에서 최종 3등을 했다. 올해는 수상자가 올라갈 수 있는 포디움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함께 출전하고 입상한 팀레이디스 언니들과 심판장께 받은 상장과 꽃을 들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작년에는 혼자였는데 올해 다 같이 상을 받으니
좋았다.
“저기... 어제 제가 배 앞에 달려있던 그거 떨어뜨린 거 죄송합니다.”
시상식까지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내게 다가와 사과를 했다. 사실 요트를 탈 때는 모자, 선글라스, 버프까지 끼고 있어서 얼굴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내게 사과한 사람을 보니 나한테 다가와 말 걸기도 힘들 정도로 어린 학생이었다. 입상을 해서 이미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데다가 막상 얼굴을 보니 화를 내던 내가 우스워질 정도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동시에 내가 받은 도움이 떠올랐다. 원래 갈 수 없었던 대회에 출전하도록 요트도 빌려주시고, 요트 운반도 도와주시고, 양양까지 차도 태워주시고, 든든하게 밥까지 사주신 도움들. 그렇게 서로 도우며 즐겁게 요트 타는 건데 내가 심했네. 기분 좋게 양양을 출발했다.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