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by 김뭉치
내가 세계를 '유동'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마치 액체가 그러하듯 이 세계가 가만있지를 못해 그 형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선 거의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화한다. 우리가 따르는 유행이며,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들이며, 우리가 꿈꾸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질색하는 것, 우리가 희망을 품는 이유와 불안을 느끼는 이유, 그 모든 것이 끊임없이 달라진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즉 생계를 꾸려나가고 미래를 도모하는 데 바탕이 되는 조건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끊는(혹은 맺을 수 없는) 데 영향을 미치는 상황 역시 계속 달라진다. 더 행복해질 기회와 불행해질 위험이 강물처럼 혹은 배처럼 흘러왔다 흘러가면서 거듭 자리를 옮기는 데다, 그 흐름은 또 어찌나 빠르고 잽싼지 우리로서는 뭔가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변화의 방향을 정하거나 돌릴 수 없고 그 물길을 유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요컨대 이 세상, 유동하는 현대 세계는 쉬지 않고 우리의 허를 찌른다. 오늘은 확실하고 적절해 보이는 것이 내일이면 쓸데없고 엉뚱하고 후회스러운 실수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집인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 거주자요 때로는 설계자, 작동자, 사용자, 피해자이기도 한 우리 자신 또한 변화에 부단히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유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곧 벌어질 법한 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갈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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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익하고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에서 가치 있는 뉴스를 걸러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분별한 잡음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골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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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들을 통해 나는 (당장은 우리에게 없고 안타깝지만 당분간도 없을) 그런 탈곡기가 있었다면 해주었을 법한 일을 시도하려고 한다. 일단 가장 먼저 할 일은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가르고, 지금도 문제이긴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문제가 될 법한 일들을 가짜 경보나 일시적인 소동과 구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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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마흔네 통일까? 마흔넷이라는 숫자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우연과 임의에서 나온 제멋대로의 선택이었을까? 대다수 독자가(폴란드계가 아닌 이상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 점을 궁금해하리라. 그러니 설명을 좀 드리겠다.

폴란드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는 한 신비로운 인물을 상상해냈다. 한편으로는 자유의 전권공사, 자유의 대변인, 자유의 대리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지상에서 자유를 다스리는 총독이나 부섭정, 그 둘이 뒤섞인 혹은 합쳐진 인물이다. 미츠키에비치 시의 작중인물은 저 심오한 존재가 곧 도착할 것을 공표/예감하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44."

왜 그 이름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유능한 여러 문학사가들이 미스터리를 해독하려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가령 시인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표기하고 그 글자의 절댓값을 다 합하면 44가 나온다며, 이는 시인이 폴란드 해방 투쟁에서 자리하는 높은 위신과 시인 모친의 유대계 혈통을 함께 가리키는 암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인정받는 해석은 미츠키에비치가 일부러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넣었다기보다, 그저 영감에 충만하여 시적 운율의 조화를 강조하려는 동기에서 - 물론 영감이 번뜩이는 순간에 대개 그렇듯 동기 따윈 전혀 없었을 수도 있다 - 저 낭랑하고도 장엄하게 발음되는 단어(폴란드어로 '치테르지에시치 이 치테리czterdzies' ci i cztert')를 이름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 한데 모은 편지들을 나는 지금까지 거의 2년에 걸쳐 썼다. 이런 편지는 몇 통을 써야 좋을까? 언제,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서 편지를 쓰겠다는 충동은 아마 언제까지고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소맷부리에서 새로운 놀라움을 꺼내고 매일같이 인간의 이해력을 시험하는 새로운 난제를 창안하는 이런 세계라면 그 충동이 결코 소진되지 않았음을 끝내 확인시켜줄 것이다. 놀라운 사건과 어려운 도전은 인간의 경험이라는 스펙트럼 전체에 흩어져 있고, 따라서 그것을 글로 전하기 위해 어느 지점에 멈춰서야 할지, 그 범위를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할지는 임의의 선택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 편지들도 예외가 아니다. 편지의 숫자는 임의로 선택되었다.

그럼에도, 왜 다른 것이 아닌 이 숫자일까? 아담 미츠키에비치 덕분에 44라는 숫자가 자유의 힘과 자유를 향한 희망, 자유의 도래를 상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이제 보게 될 서한들의 주된 모티프를 간접적으로나마, 그 비밀을 아는 자에게만이라도 암시한다. 자유라는 유령은 다양한 주제로 쓰인 이 마흔네 통의 편지 어디에나 나타난다. 설령 유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본성에 따라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에나.

- 지그문트 바우만, '1 편지에 관한 편지: 유동하는 현대 세계에서 보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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