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집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뭉치 Jan 03. 2022

새해에는 느슨한 안부를

"아니면 이런 건 어떠세요? 제가 새해에는 일기를 써 보자고 다짐했거든요. 편집자님 뵙기 전에 생각해 보니 요즘 일기가 책으로 나오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기 책’도 소구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후속작을 논의하는 미팅 자리였다. 마음 맞는 편집자와 편안하게 아이데이션을 하다 보니 불쑥 저런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일기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였을까. 역시《안네의 일기》를 접하면서부터다. 안네가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인 걸 알게 된 뒤로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걸 흥미롭게 읽은 4학년 때 담임이 그간 써왔던 내 일기장 전부를 복사해 어느 대회에 출품한 추억도 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살폈던 일기 책들도 떠오른다.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어떤 나무들은》, 문보영 시인의 일기론《일기시대》와 20대 이후의 일기들을 모은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박서련 소설가의 일기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와 황정은 소설가의 삶의 모습을 담은 《일기》까지…. 이 외에도 요즘 국내 출판계에서는 일기 쓰는 법에 대한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문학동네의 ‘총총’ 시리즈는 내게 학창 시절에 주고받았던 교환일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선 일기 형태의 책만 파는 서점도 생겼다.


타인의 내밀한 기록인 일기를 읽다 보면 나와 타인의 삶이 중첩되고 연결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코로나19로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요즘 일상에선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일기 책들의 영향 때문일까? 새해에는 일기를 써야겠다, 고 결심한 건 지난해 중순부터였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는 없다. 그냥 한 번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에 기대고 매달리는 사람이라서 그런 순간들을 기록해놓으면 언젠가 힘든 시간이 와도 잘 견뎌낼 수 있으리란 기분이 든다. 또 어지러운 일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기록과 정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언제나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김에 과거의 일기도 데이터화하고 싶다. 모아둔 일기가 꽤 되는데 그동안은 그저 계속 쌓아두기만 했었다. 어쩌면 과거의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메모장이며 다이어리며 여기저기 누덕누덕 기운 것 같은, 들여다보지 않는 일기들이 한가득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행여 엄마나 아빠가 볼세라 자물쇠가 있는 일기장을 사곤 했다. 물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파는 일기장의 자물쇠는 말도 안 되게 약해서 어른이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열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기장의 열쇠를 소중히 숨겨두곤 했다.  


좀 더 자라면서부턴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암호화해서 일기를 썼다. 사선으로 쓰기, 거꾸로 쓰기, ‘도깨비말’(초성, 중성 그리고 비읍과 중성, 종성으로 한 글자를 더해 늘려 쓰는 말)로 쓰기, 양초로 쓰기 등등 다양한 암호화 기술(?)을 사용했다. ‘리틀 셜록 홈즈’를 꿈꿨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런 일기를 쓰게 만들었다.


과연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암호화한 일기를 읽어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쨌건 이젠 단순히 모아둔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그걸 다시 컴퓨터로 기록하면서 과거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용기를 내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잘 아는 일이란 걸 매 순간 느낀다. 새해엔 매일의 나에게 느슨한 안부를 전하고 싶다. 고요함을 담아.     


김미향 에세이스트



2022년 1월 3일(월) <조선일보> '밀레니얼 톡' 코너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newspaper/023/0003663676?date=20220103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김뭉치의 브런치를 구독해주세요.



이 글을 읽고 김뭉치가 궁금해졌다면 김뭉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edit_or_h/?hl=ko



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알라딘 http://asq.kr/XE1p

인터파크 http://asq.kr/PH2QwV

예스24 http://asq.kr/tU8tzB



매거진의 이전글 미개봉 중고 신입생을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