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월 8일 토요일
아빠 생신 기념으로 동해에 내려왔다. 오전에는 병원 진료를 보러 간 동생을 대신해 조카를 봤다. 귀여운 조카는 에너자이저여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동안 쌓인 피로의 독이 없어서일까? 어떻게 저렇게 에너지가 넘칠 수 있지? 나는 회사에 가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곤 잠을 깨더라도 한 시간 이상은 누워 있어야 겨우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도 조카처럼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이 있었을까?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질 기억 조각조차 내겐 없다.
조카는 눈을 뜨자마자 웃으며 어제 내가 사 준 과일가게 장난감을 찾았다. 같이 과일을 썰면서 놀다가 이유식을 먹였다. 함께 조카에게 이유식을 먹이던 반려인은 진이 빠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제는 얼마나 힘들까? 매 순간 지치지 않을 때가 없을 거야."
반려인의 말을 듣고 보니 힘들 동생이 생각나 짠했다. 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카에게 사 준 그림책 전부를 읽어주고 집 전체를 계속 돌면서 걷고 응가를 두 번 한 조카를 두 번 씻기고 나니 귀여운 조카 녀석은 겨우 곯아떨어졌다. 게임 <꿈의 집>을 플레이하고 최승자 시인의 새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몇 장 팔락이다 보니 동생이 돌아왔다.
동생이 사 준 아이스 라테를 마시며 뉴스레터들을 엄청 구독하고 동생과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나눴다. 이후 조카를 돌보느라 지쳐서 못한 샤워를 한 뒤 아빠 생신 케이크를 찾으러 갔다. 주문한 소주 케이크를 보고 카페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놀라 쳐다봤다. 내 뒤에서 주문을 기다리던 사람은 사장에게 그 케이크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아빠는 역시 소주 케이크를 좋아했다. 소고기를 구웠으나 그전에 미니 붕어빵을 8개 먹은 나는 여느 때와 다르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잔칫상을 정리한 뒤 깨끗하게 설거지를 하고 아빠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와 함께 내향인 테스트를 했고 MBTI 검사도 했다. 아빠가 이런 테스트는 대체 왜 하는 거냐고 물었다.
밤 11시가 되자 아빠는 이제 자라고 했다. 시어머니께서 아빠 드시라고 정성껏 포장해주신 김치통을 열고 동생 시댁 몫으로 세 포기, 우리 몫으로 세 포기를 덜어냈다. 아빠 몫으로 남긴 김치는 너무 많아서 그 김치 다 먹으려면 아빠는 돌아가시지도 못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빠는 그 김치통을 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빠는 그 정도면 항아리에 김치를 묻어야 한다고 말했다. 배추김치 사이에 있는 섞박지 하나를 깨무니 시원하고 맛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김치 냄새가 손에 밴 채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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