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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Jul 16. 2022

최강 시니어 SF 로맨스

- 어슐러 르 귄, <배신>,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1. 오늘 소개할 책은?

해외소설이다. 미국의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연작 소설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중 첫 번째 단편 <배신>을 소개한다. 르 귄 문학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헤인 시리즈 중 하나다. 이 소설집 전체는 일곱 개의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를 배경으로 자유와 용서와 사랑에 관한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목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우주 저편의 세계를 거울삼아 인간 마음의 감추어진 영역들을 비추어내는 헤인 시리즈의 걸작으로 꼽힌다. <배신>은 외계인이 지배하는 식민지 행성인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2. 어슐러 르 귄? 그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작가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

스티븐 킹은 어슐러 르 귄을 “문학의 아이콘”이라고 불렀다. 미국 문학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작가이니 당연히 이름을 많이 들어봤을 거다. 많이 들어본 작가이다 보니 오히려 반작용으로 ‘어슐러 르 귄? 그 작가 작품은 다 어려운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특히 오늘 소개하는 <배신>은 어슐러 르 귄의 작품 세계에 들어갈 때 입문용으로 읽어보면 아주 좋은 단편소설이다. 쉽게 읽히는 데다 로맨스 소설이라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요스와 압버캄이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이 둘은 요즘 말하는 소위 ‘혐관’이다. 서로를 싫어하지만 마냥 싫어하지만은 않고 어쩔 수 없는 사건들로 계속 엮여 티격태격하다가 관계가 발전한다. 주인공 요스는 솔직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만약 요스가 젊은 여성이었다고 가정해보면 오히려 큰 재미는 못 느꼈을 것 같더라. 할머니가 ‘난 할머니야. 다 늙어 빠졌어’라고 푸념하듯 계속 얘기를 하는데, 할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시니어 로맨스가 귀엽다. 이 부분이 다른 SF 로맨스와 달리 색달랐고, 또 재미있었던 점이기도 하다.      



어슐러 K. 르 귄, 「배신」,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최용준 옮김, 시공사, 2014



3. 아까 소개할 때 이 작품이 수록된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이 연작 소설집이라고 했다. 그럼 이 작품이 다른 수록작들과도 연결되나?

다른 수록작들뿐 아니라 어슐러 르 귄의 또 다른 장편소설 『어둠의 왼손』과도 연결된다. <배신>에서 주인공 요스가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이렇게 쓰여 있다.  “게센에는 단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 ‘게센’이 『어둠의 왼손』에 등장한다. 게센엔 전쟁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내부를 뜯어보면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남녀의 신체적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 따라 25일마다 한 번씩 내 성별이 달라진다. <배신>뿐만 아니라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의 다른 수록작들도 차근차근 읽어보고 내친김에 『어둠의 왼손』까지 도전해보면 좋겠다.

     

4. 이 작품의 제목이 ‘배신’인 이유가 뭔가?

책 속에서 주인공 할머니 요스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내 마음이 날 배신하고, 내 기억이 거짓말을 해요. 난 거짓말을 해요. 난 주님께 의지할 수 없을 때, 세상을 놓아버릴 수 없을 때 주님에게 의지하는 척하며 주님의 이름을 더럽혀요.  

요스는 모순적인 존재다. 자식들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쿨하게 보내는 것처럼 다른 행성으로 자식들을 보낸다. 그리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지키지 못한다. 단 걸 많이 먹고 뒷담화나 가십거릴 좋아한다. 그 밖의 무수한 욕망들이 있지만 나이 얘길 하며 자꾸 그 욕망을 억누르려고 하는 존재다.

또 할아버지 주인공 압버캄은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신념 때문에 지지자들을 속이고 자금을 횡령하고 동료를 배신하는 인물이다.   

이 외에도 이 작품 안에는 여러 가지 배신의 모양들이 있다. 남도 배신하고, 나도 배신한다. 하지만 르 귄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배신의 모양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를 배신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이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이라는 소설집에 수록된 것에 비추어 볼 때, 르 귄은 결국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배신을 거듭하지만 그래도 그런 자신을 용서하는 이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5.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특히 좋은 부분이 있다면?

먼저, 아름다운 문장이다. 첫 장면이, 그 첫 문단부터 이미 읽는 이를 빠져들게 한다. 흡입력 있게 계속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간다. 그런데 그게 머리채를 막 휘어잡는 건 아니고, 잔잔하게 끌고 간다. 또 이 작품이 굉장히 생태적인 면이 있다. 1994년에 쓰인 이 작품의 생태성을 오늘날 우리나라 SF소설이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흥미로운 점이다.  게다가 우리 현실과 끊임없이 중첩되는 부분들이 나온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뉜 계급사회는 지주, 마름, 소작농이 있었던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지배층의 피부색은 어둡고 피지배층의 피부색은 밝은데 이건 지금의 현실을 뒤집은 거다. 마지막으로 르 귄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이다. <배신> 안의 세계는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안의 세계 속에 있다. 작고 큰 얘기가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굳이 SF가 아니어도 될 소재를 가지고 요즘 SF가 유행이니 거기에 맞춰 내놓자, 하는 세계가 아니고 SF가 아니면 안 될 이야기인 것이다. 2022년의 독자로서 <배신>이 색달랐던 점은 희망을 얘기한다는 점이었다. 팬데믹 이후 국내 SF들을 보면 대부분 디스토피아 세계를 많이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와는 결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선하고 색다르게 느껴졌다. 휴가 중에 이 작품을 살짝 펴서 훑다가 놓을 수가 없어서 그만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는데, 이 좋은 걸 나만 알고 있을 수 없지 않나. 청취자들도 이 소설의 재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김미향 에세이스트·출판평론가



2022년 7월 14일(목) KBS 라디오 <생방송 오늘 원주입니다> '책과 함께 떠나는 산책' 코너 진행 원고입니다

생방송오늘 원주입니다 | 디지털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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