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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Jun 07. 2023

끝내 시가 되어 버리지 못하고 빗금이 쳐진 글들의 모음

1. 오늘 소개할 책은?

《가기 전에 쓰는 글들》입니다. 끝내 ‘시'가 되어 버리지 못하고 빗금이 쳐진 '글'들의 모음인데요.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遺稿集)입니다. 유고집이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엮어 사후에 출판한 책을 말하지요. 그래서인지 막상 이 책의 실물을 대하고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겨보면 다른 책을 대할 때와는 마음가짐이 사뭇 다르실 겁니다.   


2. 오. 시인이 생전에 쓴 글들을 모은 거라 책 구성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구성을 한 번 살펴볼까요? 이 책은 시인이 쓴 시작 메모, 미처 시집으로 묶이지 않았던 열세 편의 시, 그리고 시인의 작품론과 시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버릴 것 없는 문장들이지만 저는 특히 1부와 3부에 흠뻑 빠져 들었어요. 1부는 시인이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7년 동안 시인은 초반엔 거의 매일같이 일기를 썼으며 훗날엔 드문드문 기록을 남깁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드는데요. 그러나 빠짐없이 썼든 그렇지 않든 그 메모들은 시보다 더 시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이 1부와 3부를 통해서 시인이 생각하는 시란 어떤 모양인지, 시인이 어떠한 태도로 시 쓰기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흥미로운데요. 책 속 문장들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신다면요?

 “어제 한 메모. 그 가운데 시라는 것은 사물과 세계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음의 불가능에 대한 운문이다." 이런 문장에서 시인이 생각하는 ‘시’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요.

“시가 널널해져야 한다. 실험의 시간은 지나가고 언어와 언어가 표현해내는 세계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벼려야 한다. 이제 언어와 대결하는 일, 세계를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는 2011년 5월 14일의 일기에서는 시인이 어떠한 태도로 시 쓰기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2011년 5월 23일의 일기에 “언젠가 어느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면서 삶은 삶에 먹히고 결국 남는 것은 시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다."는 문장이 있더라고요. 기록의 중요성과 함께 시인이 예술가로서 어떠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고요.

마지막으로, “다만 삶에 대한 절박함인데 그 절박함을 인식하는 주체가 말을 통해서만 자신을 형성했다고 착각을 하는 동안 언어 예술의 긴장은 유지된다. 거의 죽음에 맞먹는 긴장 속에서 생겨난 말과 리듬만이 남고 한 인간이 죽음으로 들어갈 때."라는 문장 속에서 죽음을 앞둔 상황 속에서도 시인이 어떻게 이 지난한 삶을 사랑하고 견뎌내며 살아왔는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4. 네, 정말 말씀처럼 아주 시적이면서 동시에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시 쓰기에 대한 태도까지 엿볼 수 있어 소중한데요. 아까 1부와 함께 3부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어떤가요? 

네, 맞습니다. 3부는 시인의 작품론과 시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허수경 시인이 어떻게 시를 만들어나갔는지를 알 수 있어 참 좋더라고요. 목차대로 읽으셔도 좋지만 제가 앞서 설명한 1부와 3부를 바탕으로 2부에 실린 시들을 읽으시면, 한결 새롭게, 허수경 시인의 작품을 읽어내실 수 있습니다. 결국 허수경 시인의 시들은 시인지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자유로움 속에서 탄생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5. 좋습니다. ‘이 더위를 차분-하게 식힐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무래도 ‘유고집’이다 보니 책을 읽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시인의 삶과 시, 글을 되돌아보면서 자연히 언제나 우리 곁에 놓인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2011년부터 써 내려간 죽음에 대한 시인의 글들을 보면 서늘하고 쓸쓸한데요. 훗날 암 발병 소식을 듣게 되는 날로부터의 메모들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만가만 자신의 삶을 끌어안는 시인의 모습이 투명하게 비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2011년 4월 28일에 시인이 이런 메모를 썼어요. "너무 매달려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첼란과 바흐만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너무나 서늘해진다. 아무리 뛰어난 모든 심장의 순간도 그렇게 가고 또 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렇게 오래 엎드려 있다가 일어날 수도 없는 봄 오후"도 결국 "나의 것"(2011년 4월 26일 「봄 오후」 중에서)일 텐데요. 그러니 당신의 "시가 자신의 시간을 사는 동안 나의 시간을 살"(2011년 5월 5일)았던 시인처럼 우리도 우리의 시간을 잘 견디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답을 구하며, 그렇게요.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2023년 6월 1일(목) KBS 라디오 <생방송 오늘 원주입니다> '책과 함께 떠나는 산책' 코너 진행 원고입니다

생방송오늘 원주입니다 | 디지털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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