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말로 우리를 고뇌스런 삶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하지만 모든 순간들이 이어지면 영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한대수,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올드보이 한대수』, 39p
여자는 발가벗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무심했다. 그저 태연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이들에게 목례로 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를 보는 친척들의 눈길은 예사롭지 않았다. 조 년이 제일로 무서운 년이랑께. 펌이 거의 풀려가는 짧은 머리칼이 사자갈기처럼 곤두선 여자의 육촌 언니가 수육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테이블엔 이미 소주 세 병, 막걸리 네 병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녀와 동기간인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짙은 남자는 회색빛의 머리칼을 뒤로 한 번 넘기더니 불콰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불쌍한 애잖아. 그냥 놔둬. 하여튼 여자들이 더 무섭다니까. 이건 뭐, 친척이고 뭐고 없네. 남자의 말에 그의 누나가 눈을 부라렸다. 그럼 지 애비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내비치는 조 년이 사람새끼당가.
그 소리가 좀 컸던지 좌중의 이목이 넙치의 눈처럼 왼쪽으로 쏠렸다. 발가벗겨진 여자도 육촌 언니쪽을 바라봤다. 얼핏 여자의 얼굴에 약간의 슬픔과 묘한 적의가 어리는 듯했으나 여자는 이런 것쯤 익숙하다는 듯 다시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벌거벗은 채로 살아온 삶, 한 번 더 발가벗겨진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듯이.
손님들을 마주한 여자의 뒷모습이 납작했다.
*
여자의 이름은 순정이다. 순수할 순純에 바를 정正자를 써 ‘순정純正’. 여자가 처음으로 정을 나눈 남자는 큰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순정, 세상의 온갖 순하고 정한 것들이 다 네 안에 있다, 고 말했다. 그때까지 여자는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이가 그리 말해준 뒤로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게 됐다. 그녀 앞에 펼쳐진 먹구름을 다 가려줄 만큼 큰 그의 손바닥보다도 세상의 온갖 순하고 정한 것들, 이라는 그 문장의 어감이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을 보드랍게 간질였다. 나는 착하지 않아. 순하지도 않고. 여자가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네가 순정인데 어떻게 순하지 않을 수 있어, 라고 말하며 여자의 조그만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순하고, 정하다.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때 여자는 속으로 그런 단어들을 되뇌고 있었다.
그이와 계속 만났다면 지금 여자의 삶은 달라졌을까. 여자는 가끔씩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고는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의 뚜껑을 열어보는 일이 잦다. 철지난 기억 속에서 여자는 행복했던가. 잘 모르겠다.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은 있었던가. 그것도 모르겠다. 아니, 대체 사랑이 뭔가. 그것조차 모르겠고.
사랑을 하기에 여자의 삶엔 구멍이 너무나도 많았다. 여기저기 해진 삶을 기우느라 여자는 누군가의 입김만 닿아도 아팠고 두려웠다. 여자가 생활에 익숙해져갈수록 여자의 욕망은 시들었고, 종당에는 바짝 말라 파락, 하고 잎이 떨어졌다. 무언가를 뜨겁게 원하기엔 여자 앞에 놓인 굴곡이 너무 깊었다. 그리고 여자는 절망을 우아하게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 절망은 절망 그 자체로 여자에게 절망적이었기에.
대신에 여자는 무서움을 알았다. 여자는 무서움 속에서 태어났다. 여섯 자매 중 막내딸이었다. 아들을 낳으려는 부모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시골 마을의 유지로서 아들이 없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던 아비는 딸, 딸, 딸, 딸에 이어 또 딸을 낳자 한동안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아비는 여자와 어미를 볼 때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여자는 아비와 어미, 둘 모두에게 죄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여자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언니들 말로는 여자가 어릴 때 심한 열병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골 마을이라 의사가 귀했고 그나마 하나 있던 의사는 단순 감기로 보고 약을 잘못 처방했다. 그 약을 먹은 세 살 때부터 여자는 반쯤 고요한 세계 속에 뿌리를 내렸다. 한쪽이 들리지 않는 세계는 한쪽만 물에 잠긴 식물처럼 부어올랐다. 그 세계는 고요해서 안온하지도, 소음이 사라져 평화롭지도 않았다. 웅웅거리는 낯선 소리들 사이에서 여자는 홀로 무서움에 떨었다. 세계는 오직, 무서움뿐이었다.
…순정아. 순정…아.
여자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늘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한 번에 알아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게 맞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아비는 여자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어디서 저런 게 태어났단 말이야. 응? 감히 어디서? 그러면서 아비는 방바닥을 쓸고 있던 어미의 등을 후려치거나 가마솥에 밥을 짓고 있던 어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여자는 아비가 부를 때 지체 없이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깊은 밤이 내려앉고 잠자리에 들 때쯤 되어서야 여자는 지친 몸을 잠시 쉴 수 있었다. 그마저도 어떤 날은 아비가 어미에게 손찌검을 하는 걸 어둠 한구석에서 벌벌 떨며 지켜봐야 했다. 어미는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소리 없이 온몸으로 매를 맞아냈다. 여자는 그런 어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비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가 태어나고 1년 뒤에 여자의 동생이 태어났다. 부모가 그토록 기다렸던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남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못 가 열꽃에 시달리다 죽었다. 부모는 2년 뒤에 다시 남동생을 낳았다. 이번에는 열병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약을 잘못 쓰지도 않았으며 귀도 멀쩡했고 아주 건강했다. 부모는 이 남동생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머리를 쓰다듬을 만큼 귀애했다. 여자가 보기에도 남동생은 아주 사랑스러웠다. 자라면서 남동생은 키도 쑥쑥 크고 아비를 닮아 눈도 부리부리해져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도 되겠다, 고 농을 건넬 정도가 됐다.
이 남동생이 태어나고 3년 후에 막내가 태어났다. 이번에도 사내아이였다. 눈이 컸고 피부가 뽀얬다. 여자의 큰언니와 막내는 스무 살 차이가 났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큰언니가 막내를 키우다시피 하다 시집을 갔다. 그 뒤 막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순하기 그지없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빽빽 울어대기 시작했다. 의원을 불러도 차도가 없었고 귀하다는 약재를 달여 먹여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부모는 막내를 포기했다. 오직 여자만이 막내를 어르고 달래며 이유식을 먹이고 애면글면 정성을 쏟았다.
그러기를 수개월, 막내의 몸이 차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울음을 그쳤고, 밥도 잘 먹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무리 불러도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앞에서 큰소리로 말을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고 작은 이마에 쪼글쪼글한 주름이 잡힐 때, 여자는 마룻바닥을 치며 울었다. 막내는 여자가 처음으로 온 애정을 쏟은 대상이었다. 그런 막내가 오랜 열병의 후유증으로 두 귀의 청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자는 가시밭길일 막내의 앞날이 무섭고 두려워 그저 넋 놓고 우는 것밖엔 해줄 게 없었다.
여자와 막내는 집안의 온갖 미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하나는 들을 수는 있으나 늘 어설퍼 아비의 호통과 마주서야 했다. 또 하나는 두 귀 모두 들리지 않으니 하릴없이 고스란히 바보 취급을 당하며 클 수밖에 없었다. 어미는 본인 배 속으로 낳은 두 남매가 가엾고 또 가여워 매일 밤 그들을 품은 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여자와 막내는 얼마 되지 않은 시린 삶의 무게가 버거워 흙냄새가 나는 따스한 그 품에서 오래도록 머물 수 있기를 바랐다.
남매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여자와 막내는 여섯 살 터울이었으므로 함께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내심 서로의 학교생활을 이해하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 순간, 여자는 자신에게 언니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직감했다. 여자에게는 위로 다섯 명의 언니들이 있었는데, 그중 큰언니와 둘째, 셋째 언니는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여자와 각각 세 살, 두 살 터울이 나는 넷째 언니와 다섯째 언니는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여자의 집에서 3분 정도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파란색 지붕과 하얀 벽의 학교가 보였다. 선생님들은 저마다 여자를 순희 동생, 순영이 동생으로만 불렀다.
여자는 학교를 다니는 6년 동안 책상에 앉아 제대로 공부를 해본 기억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여자가 언니들처럼 똑똑하고 꼼꼼할 거라 지레짐작해 여자에게 온갖 심부름을 시켰다. 이 선생님, 저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학교가 파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본 수업까지 거의 받지 못하게 되니 여자는 더더욱 공부에 뜻이 없었다.
때때로 여자의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면, 같은 반의 까까머리 남자아이들이 더럽다며 그악스럽게 여자를 놀려댔다. 그럴 때 여자는 눈물을 흩뿌리며 언덕 위의 빨간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지게를 지고 밭으로 나가던 아비가 그 모습을 보고 지겟대를 들고 달려와 여자를 학교로 쫓아보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여자는 두 손에 슬픔을 묻고 다시 내리막길을 달려야 했다.
그렇게 여자는 학교와 공부에 취미도, 재미도 붙이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말았다. 애초에 중학교 진학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단 한 번 꿈이라도 꾼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각각 상급학교에 진학한 언니들이 부러웠던 적은 있다. 언니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여자는 늘 집에 있어야 했다.
집 밖은 어떤 세계일까.
여자가 경험해본 집 밖의 세계는 학교가 유일했지만 그마저도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거리였다. 그때부터 여자는 늘 집 밖의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여자는 어미를 도와 쌀을 씻고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아비를 도와 모를 심고 소에 여물을 줘야 했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어서 쉴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하루가 끝나면 또 하루가 몰려왔다.
여자가 열다섯이 되던 해, 막내가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막내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야, 이 녀석들아! 어른들 불러올 거야! 소리치며 지겟대를 휘두르자 돌을 던지던 아이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여자는 그 아이들 중에 자신의 첫째 남동생이 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순규야. 여자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애는 한 번 뒤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들의 무리에 섞여 사라졌다. 순규야! 여자가 악을 쓰며 남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그 뒤로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잔혹했다. 어른들의 잔혹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이라고 예외가 없다는 것에 여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날 막내와 부둥켜안은 채 여자는 한참을 울었다. 막내야. 너는 이 집에 남지 말고 떠나. 가능하다면 그러는 게 좋겠어.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막내에게 그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여자의 영향인지 막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떠났다. 듣지 못하면서 중학교는 무슨 중학교냐며 같이 농사나 짓자, 는 아버지를 졸라 농아인들을 대상으로 한 중학교를 수소문한 끝에 그곳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막내가 떠나던 날 짐가방을 챙기면서 여자는 참 많이 울었다. 여자에게 막내는 늘 걱정되는 애틋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연고도 없는 타지에 보내야 한다니.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막내를 지켜주기는 힘들 거란 생각에 여자는 가슴을 쳤다. 만일 막내가 그곳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여자는 집을 떠나라고 소리치던 과거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터였다.
막내가 떠나자 여자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몸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숭숭한 구멍 사이로 시종 바람이 불어 잠자리에 들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빨리 이 집을 떠나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여자는 매일 밤 발로 이불 끝을 부비적거리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숱한 불면의 밤 이후 여자는 연애를 시작했다. 여자가 첫 정을 준 상대는 펜팔로 만난 남자였다. 잡지를 보고 편지 왕래를 시작했다. 울산에 사는 남자였는데 무엇보다 여자의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집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을 거야. 편지를 주고 받다보니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편지가 오가는 횟수가 잦아지자 남자는 여자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오는 일요일마다 여자는 핑계를 대고 집을 빠져나와 잠깐이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연인들에게 일요일 하루는 너무 짧았고, 여자는 점점 부모에게 댈 핑계가 줄어들었다.
이제 부모님께 댈 핑계가 없으니 당분간 시일을 두고 만나자, 는 여자의 편지를 받자 남자는 결심을 굳혔다. 여자에게 청혼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으로 주어진 집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 그러나 여자는 망설여졌다. 여자는 부모도 싫었지만 일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부모도 일도 없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싶었다. 남자만 생각하면 결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식솔들이 마음에 걸렸다. 남자는 여자보다 형제가 많았다. 무려 10남매의 장남이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모자라 밑으로 줄줄이 늘어선 아홉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생각을 하면, 여자는 돌연 앞이 캄캄해졌다. 남자를 만날 땐 희망의 빛이 어둠 속에서 일렁였으나 남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잠시 보였던 그 빛이 금세 천변 저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순식간에 사위어 갔다.
그리고 그날, 핑계조차 사라져 몰래 집을 빠져나와 남자를 만나 청혼을 받았던 그날, 여자는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뒷간에 다녀오던 넷째 언니가 마당 안에 들어선 여자를 보더니 놀라서 여자를 잡아끌었다.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쉿. 언니는 입을 모으고 입술에 검지를 댄 채 여자의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며 집 앞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잔말 말고 정자네 가 있어라잉.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서야 언니는 여자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왜? 아부지 또 화났어라. 일하다 말고 어딜 갔냐고 아주 노발대발이어야. 느 지금 아부지 눈에 띄면 그날로 엄니도 죽고 느도 죽는 기여.
그때 여자의 눈에 지겟대를 휘두르며 쫓아오는 아비의 모습이 보였다. 이 년이 일하다 말고 어딜 갔다 오는 겨. 거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냉큼 이리 오지 못할까. 죽어도 일하다 죽으라고 이 아비가 말했냐, 안 했냐. 응? 하늘 같은 아비 말을 느가 귓등으로 듣는다 이거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 같으니라구. 느 멕이고 재우는 값은 하늘에서 떨어지냐, 땅에서 솟냐. 느 밥값은 느가 해야 되는 거 아녀. 언능 이리 못 와. 아비는 노기를 띤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여자를 쫓아왔다. 도중에 구두가 벗겨져 맨발로 달렸고, 발바닥에 가시가 박혔는지 따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여자는 잡히면 으레 따라올 아비의 매질이 더 무서워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맨발의 여자는 결국 아비에게 잡혀 언덕 위 빨간 지붕 집까지 끌려갔다. 아비는 여자의 원피스를 사정없이 찢고 동네 창피한 줄 모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디 간나가 겁도 없이 남자를 만나고 돌아댕겨. 어어? 내가 느를 그리 가르쳤냐. 듣지도 못하는 가이나가 그쪽으로만 발달한 겨? 잉?
여자는 멍이 든 얼굴을 챙이 넓은 모자로 가린 채 밭을 매면서 아비 몰래 울었다. 그 모습을 본 어미도 한쪽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여자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멍이 빠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가 남자한테 보낸 편지에는 당신이 날 만나러 오면 나는 그날로 죽게 되니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순하고 정한 게 바보 같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면 자신은 정말로 ‘순정’이라는 이름에 딱 걸맞는 여자라고, 정말 고마웠고 다만 미안하다, 고만 적혀 있었다.
여자의 어미는 매일 밤 구석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여자가 가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비가 외출하고 없을 때에 어미는 여자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차려놓고 여자에게 밥을 먹였다. 어느 날 아비가 며칠 친척집에 머물다 돌아오겠다, 고 했을 때 여자의 어미는 옳다꾸나 싶었다. 야야. 기분전환도 할 겸 시내에 갔다오자. 예쁜 옷도 사고 맛난 밥도 사주꾸마. 어미의 말에 여자는 부스스 일어났다.
어미와 딸은 시내에서 잔치국수를 훌훌 말아먹고 장 구경을 했다. 날이 좋아 햇볕 받은 이불이 보송해보였다. 상인들은 활기가 넘쳤고 여자는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집으로 가기 전 어미가 의상실에 들르자고 했다. 느 예쁜 원피스 아부지가 다 찢어먹었잖냐. 새로 하나 사주꾸마. 예쁜 놈으로 골라보랑. 여자는 하늘빛 퍼프 소매 원피스를 골랐다. 목에는 하얀 카라가 달려 있고 치맛자락은 쉬폰이라 청량감이 느껴졌다. 이번 원피스는 아부지한테 찢기지 말았음 좋겠어. 여자는 어미의 밤비 같은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미가 지켜주꾸마. 걱정 말랑. 계산을 할 때 카운터를 보고 있던 여사장이 여자에게 남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요서 이렇게 가게를 보니께 사람 얼굴만 봐도 느낌 알잖아. 언니만한 규수가 없다니께. 괜찮은 사람 있어요. 한 번 만나봐. 참 착한 사람이야.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빛이 다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
여자는 형제도 많지 않고 장남도 아닌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었다. 외동도 싫었다. 외동은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는 어른들의 말보다 집안의 단 한 명뿐인 아들에게 쏟아질 기대가 여자에게 전이될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바라는 몇 안 되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들이 많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땡볕에서 농사를 짓고 소에 여물을 주고 부모를 위한 밥을 준비하고 때때로 아버지의 호통과 마주하며 소일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의상실 여사장이 소개팅을 주선한 것이다.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대낮이었는데도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술 냄새가 나죠? 죄송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워낙 험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선 힘을 내기 어렵거든요. 회사에서 새참으로 술을 줍니다. 막걸리, 맥주, 소주. 양주 빼곤 다 있어요. 제가 제일 마시고 싶은 건 양주인데 아 글쎄, 그것 빼곤 다 줍디다.
지금 이걸 유머라고 하고 있는 건가. 여자는 남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굴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성격도 호방해보였다. 이 사람은 아비로부터 나를 데려갈 수 있을까.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제 밑으로 동생놈이 둘 있습니다. 삼형제죠. 제가 장남입니다. 사실 여동생도 하나 있었는데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물컵에 있는 물로 입술을 축였다. 죽었습니다. 불쌍한 아이지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래로 처진 그의 속눈썹이 낙타의 그것처럼 길었다.
그 속눈썹이 여자의 마음에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죽은 동생에 대해 말하며 파르르 떨리는 그 속눈썹은 그의 말이 진심에서 나온 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어떤 결핍이 여자의 마음에 와 박혔다.
죄송해요.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 같아요.
아, 아닙니다.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온 집안이 정말 기뻐했죠. 물론 저도 기뻤고요. 시커먼 사내놈들밖에 없는 집안에 꽃 같은 여자애가 등장했으니, 그도 그럴 밖에요. 아버지가 정말 귀여워하셨죠. 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시기 전엔 꼭 그애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안겨주셨죠. 아, 저희 아버지는 선장이셨답니다. 배가 한 세네 채 있었나, 그랬을 겁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배 좀 타보려고 집에 많이 찾아왔었죠. 그때 아버지, 참 잘 나갔어요. 저도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자라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죠.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저 역시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풍랑을 만나 그만 바다에서 돌아가신 겁니다. 산처럼 크고 바다보다 깊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풍랑 앞에선 그냥 휙 쓰러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보잘것없는 인간이었을 뿐이었죠. 배는 좌초됐고, 선원들 전부 죽었습니다. 집도 팔고 그렇게 전 재산을 유족들한테 줬어요. 어쨌든 선장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니까. 그때가 제가 열여섯이 되던 해였죠. 고등학교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됐는데 다 망했죠, 뭐. 그때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일했습니다. 노가다에, 탄광에, 서울에 가서 통조림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지요. 지방에서 일하는 것보단 보수를 많이 줬거든요. 공장 기숙사에선 늘 배가 고팠어요. 배는 고픈데, 돈은 집에 보내야 하고, 많이 보내려면 밥을 굶는 편이 나으니까 땅콩을 한 봉지 사서 허기질 때마다 그걸 조금조금씩 먹으며 배를 채웠어요.
고향 내려와서는 물일을 배웠습니다. 힘은 들지만 이것만큼 돈 되는 일이 없죠. 나름 재미도 있고요. 물속에선 자유로울 수 있거든요. 바다와 나, 우리 둘뿐이에요. 고요하죠. 처음 들어갈 땐 물이 차 몸이 깜짝 놀라도 계속 있다 보면 따뜻해요. 그냥 물살이 저를 막 위로해주는 느낌이 들어요. 괜찮다, 괜찮다. 너른 품으로 감싸안아주는 기분이랄까요. 혹시 고리에 가보셨나요?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리에 가면요. 거기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 물이 특히 따뜻하죠. 그건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요. 그냥 신기합니다. 열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물고기들이 심해에서 헤엄을 치고 있거든요. 물속에서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는 거죠.
어쨌든 저는 지금 제 일에 만족합니다. 머구리로서의 자부심도 있고요. 잠수병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거야 뭐 나중 일이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아야죠. 특채로 공무원 시험 보라는 얘기도 몇 번 들었는데요. 제가 치우라고 했어요. 그런 짜여진 생활은 저한테 안 맞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거든요. 물속이 좋죠.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이 일로 동생놈들 대학교도 보내고 먹여살렸으니까 보람됩니다. 여동생도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여렸어요. 결혼하고 싶어 한 남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죠. 아버지가 그렇게 귀애하며 키웠는데 별 볼 일 없는 놈한테 시집간다니,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죄를 짓는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아침밥을 먹으라고 방문을 노크하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애가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어디서 났는지 수면제를 많이도 먹었더라고요.
여자는 남자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의 말투가 여자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비록 장남이었으나 남자는 여자가 아는 남자들 중 가장 형제가 적었다.
세 번째로 남자를 만났을 때 여자는 또 다시 남자에게서 술의 흔적을 보았다. 그날은 남자가 일을 쉬는 날이라 만남을 가진 것인데도 그랬다. 여자는 남자에게 술 냄새가 나요, 라고 말했다.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여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레 잠이 안 와서 간밤에 술을 조금 마셨다고 했다. 너무 긴장되더라고요. 순정 씨는 안 그랬어요? 저는 술을 못해서요. 여자는 조심스레 말하며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량이 어떻게 되는데요? 남자는 여자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사실 마셔본 적이 없어요. 여자는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 한 번 마셔보면 되겠다! 남자가 유독 기뻐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여자가 사양했음에도 남자는 거듭 한 잔만 하자고 졸랐다.
술집에서 소주와 두부김치를 시켰고, 남자와 건배를 했고, 술잔을 입에 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여자는 그 후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가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해서 여자가 집에 가 봐야 한다고 했던 것, 거듭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 드문드문 생각났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고 그로부터 얼마 뒤 여자는 남자와 결혼했다. 여자의 아비는 남자의 집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으나 여자의 배를 보고는 하릴없이 결혼을 허락했다. 여자의 결혼사진 속에는 술을 마시고 와 얼굴이 붉은 남자와 술 냄새가 싫어 이맛살을 찌푸린 여자와 여자의 뱃속에 숨쉬고 있던 아이,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찍혀 있었다.
결혼 후 여자의 삶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농사일에서 해방된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 뒤에 출산을 하자마자 성게 까는 일을 시작했다. 남편이 일을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데 썼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서 여자는 남편의 얼굴마저 잊을 정도였다. 아니, 사실 여자는 남편의 얼굴을 잊고 싶었다. 미치도록 잊고 싶은데 남편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 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남편을 증오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여자는 집을 탈출해 또 다른 감옥으로 들어온 것이다. 안쓰러운 것은 이 감옥은 전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때때로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남편은 술에 취해 여자를 욕보이기 일쑤였다. 여자가 거부하면 그때부터 매질이 시작됐다. 남편은 피임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 관계를 가지는 쪽보다 맞는 쪽을 택했다. 남편의 아이는 한 명으로 족했으니까. 그러자 남편은 이따금씩 출장을 갈 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싫은 내색 없이 남편의 여자까지 거둬 먹였다. 어떤 날은 국이 짜다고, 또 어떤 날은 반찬이 적다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 끌려갔다. 남편이 데려온 여자 앞에서 맞아야 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남편한테 맞아 코뼈가 부러져 피가 줄줄 흐르고 두통이 심해 누워 있는데 시어머니가 들이닥쳤다. 여자의 몰골을 보고 혀를 쯧쯧 차며 시어머니는 밭에서 따온 채소들을 현관 앞에 부리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날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집구석에서 팽팽 놀고 있으면서 어머니가 준 채소를 손질도 하지 않고 짐 부리듯 부려놓냐, 며 여자의 왼쪽 뺨 오른쪽 뺨을 차례대로 열 번씩 때렸다. 찰싹찰싹 소리에 머리가 돌아가면서 여자는 자신의 팽팽 돌아가는 이 세상이 도무지 언제쯤 끝날 수 있는지 하늘에 물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도망치지 못했다. 여자는 어느새 남편에게 지배당하고 휘둘리고 있었다. 남편의 폭력은 싫었지만 남편의 경제력은 필요했다. 일하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아도 남편은 여자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집에 가져다줄 수 있었다.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죽을 용기가 없었다. 남편을 죽일 생각은 아예 하지조차 못했다. 그래도 남편은 여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이,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여자는 아이를 두고 도망칠 수도, 죽을 수도, 남편을 죽일 수도 없었다. 경제력이 없었기에 혼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일을 지으며 살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손가락질할 아버지와 친척들, 동네 사람들이 무서웠다. 이미 여자의 동네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는 여자가 그토록 꿈꾸던 결혼을 했으나 이상한 남편 만나 눈물 없이는 못 봐주게 산다며 소문이 나 있던 터였다. 유일하게 여자를 감싸주던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게다 남편은 애초에 이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남편의 결핍이 자신을 집어삼켜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뒤였다. 여자는 온전히 뿌리 내리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애당초 뿌리란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뿌리 대신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났다. 남편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도 같았다. 언제나 불안이 그를 잠식해 집안 분위기는 금이 간 휴대폰 액정처럼 위태로웠다. 숨만 쉰 채 두고 보더라도 언젠가 액정은 깨지고 그녀는 그렇게 남편에게 얻어터질 것이었다. 뿌리 없는 자의 불안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우울은 커져갔고 원을 그리듯 퍼져갔다. 여자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자신은 삶의 진창 한가운데로 더 깊이 빠져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자에겐 답이 없었고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길고 무거운 사슬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삶은 오로지 생존 그 자체로 점철돼 있을 뿐임을, 어느 새벽 짙은 푸르름 속에서 깨닫고야 말았다.
독처럼 자라나는 우울 속에서도 여자는 끊임없이 살아냈다. 별 같은 여자의 아이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삶이라는 무서운 경기에 내던져진 여자는 자신의 아이 또한 이 불안의 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게 죄스러웠지만, 꼬물꼬물한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이 아이만이 여자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걸, 그래서 아이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 자신은 이 아이의 작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주 어쩌면 팽팽 도는 이 세상의 팽이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순정 씨! 밤이 어두워도 다음 날에는 늘 아름다운 해가 뜨는 거 알죠, 라고 말해주던 아이의 희망찬 입술을 믿었기에 자신이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일은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고,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도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 보인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는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할 수만 있다면 이 여자,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 마치 영화 <나비효과>의 감독판 엔딩처럼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때때로 나 하나만을 믿고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세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믿음과 희망을 짓밟아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내게도 역시 엄마가 구원이었기에, 언젠가 내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나를 욕하고 발로 걷어찰 때에도 엄마만은 내 피난처가 되어줄 것을 믿었으므로, 어떤 한 사람에게는 다른 한 사람의 손이, 그 손이 아무리 작고 거칠더라도 어두운 숲속 가시덤불을 잘라낼 수 있는 칼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답이 없는 삶이 답인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면서.
순정 씨!
내가 부르면 엄마는 잘 들리지 않으면서도 들리는 척을 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엄마의 이름을 계속 부르게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게 한다.
순정 씨, 순정 씨, 순정 씨…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정한 사람, 이 세상에 꼭 한 명쯤 있어야 할 사람, 순정 씨가 웃는다.
언 땅 위에서 꽃이 피어나듯,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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