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by 김뭉치

담배 연기가 허공중에 흩어진다. 답답하다. 가슴에 뭔가가 들이찬 듯하다. 그래도 담배를 피우는 이 시간만큼은 당신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달디 단 순간이다. 술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런 말을 내뱉을 수도 없다. 그랬다간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 알 수 없다. 당신은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별다른 건 없다. 맞은편에 아웃도어룩을 파는 매장이 보인다. 정식 브랜드숍은 아니다. 그냥 이것저것 브랜드별로 모아 싼값에 파는 곳이다. 그 외에는 도로뿐이다. 허허벌판이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하얀 외벽을 자랑하는 어느 건물 앞이다. 당신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오늘은 딸이 오려나.


딸은 얼마 전에 편지를 보냈다. 큰딸이었다. 그 편지에는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녀는 당신을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당신은 큰딸을 신뢰한다. 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모두를 믿지 않고 또 모두를 믿고 있다.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믿고 있다. 당신은 그런 류의 인간인 것이다. 믿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그런 스스로가 답답하다고 여긴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런 인간이다. 바꾸고 싶지만 바꿔지지가 않는다. 이미 반백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라고 하면 변명이 되려나. 그러나 사실 당신은 변명에 능한 인간이다. 당신의 오십 평생은 변명으로 점철돼 있다. 변명뿐인 삶이다.


당신은 운동화로 담배를 비벼 끈다. 보통의 운동화와는 다른 신발이다. 어린애의 그것처럼 끈이 없는 운동화다. 찍찍이다. 마음에 안 든다.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역시 이곳에 있는 한은 더욱더 다 마음에 안 든다. 이 신발은 전에 아내가 면회를 왔을 때 두고 간 것이다. 여기서는 끈 있는 물품은 반입이 안 된다네. 이걸 사 오라고 신신당부했어. 근데 요즘 이런 게 있어야 말이지. 찾느라 무지 고생했어. 당신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뭣하러 그런 고생을 할까. 그냥 나를 여기서 빼주면 되는데. 그럼 이 겨울에 끈 없는 운동화를 찾아 온 시장을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다. 마음에 안 든다.


카악. 당신은 가래침을 뱉는다. 당신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백발의 노인이 눈에 띈다. 저 노인은 또 저 지랄이네. 이제는 들어갈 시간이다.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눈총을 받게 된다.


당신은 방으로 들어간다. 당신 같은 사람들 여럿이 각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 이리 둘러봐도 당신이고 저리 둘러봐도 당신이다. 모두 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신 눈에는 이 사람들 모두가 하나로 보인다. 한 덩어리로 보인다. 여기서 다른 이들과 다른 것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이들과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저들 각자도 다 사연이 있는 이들이다. 당신은 그들을 가엾게 여긴다. 모두 다 가여운 사람들, 이라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준다. 그들과 당신은 통하는 게 많다.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좋아하고 이곳을 싫어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만큼의 공통점이라면 당신과 저들은 하나로 뭉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그들과 공통점이 몇 개 있을 뿐, 이라고 여기고 있다. 당신은 그들처럼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영세민이다. 또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그들을 모시고 산다.


한심한 족속들, 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엾다. 가여운 이들이다. 자기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모든 건 세상 때문, 또는 회사 때문, 또는 아내 때문, 또는 아버지 때문, 또는 자식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인가. 당신은 무엇 때문이야? 당신 자신도 그 질문을 스스로 품은 적이 있었다. 산모가 배 속에 고운 아이를 품듯, 당신도 소중하게 그 질문을 품은 적이 있었더랬다. 그러나 곧 답하기를 그만뒀다.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아름다운 법이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질문을 품고 있을 때 당신은 빛났다. 그러나 과연 지금도 그러한가. 질문을 송두리째 버린 지금,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역시 부질없을 뿐이다. 당신이 답하기를 거부했으니까.


당신은 밖으로 나간다. 밖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건넨다. 당신의 목소리는 저음이고 당신의 얼굴은 준수한 편이므로 당신의 성대를 통해 울려 퍼지는 발화는 때때로 상대에게 묘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당신은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고 말한다. 간호사가 웃으며 묻는다. 어디 불편하세요? 당신은 이곳에서 보기 드문 신사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말수가 없는 편이었고 늘 조용히 움직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곳에 세탁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옷은 스스로 빨아 입었으며 거부하지 않고 약도 잘 먹었다. 그리고 책. 당신은 늘 책을 읽었다.


간호사들은 그런 당신의 모습을 좋게 보았다. 햇살이 내리면 당신은 그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읽어내려가는 것들 중엔 이곳에 구비된 책도 있었고 딸이 읽어보라고 보내준 것도 있었다. 당신은 역시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활자 하나하나를 꼭꼭 씹었다. 그렇게 소일했다. 어릴 때부터 당신은 책을 좋아했다. 그러나 술로 세월을 세척해내는 동안 책에 대한 애정도 함께 씻겨 내려가 버렸더랬다. 이곳에서는 세척할 술이 없었으므로 당신은 어쩌면 하릴없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들은 당신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이곳에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당신이 이런 생활을 지겨워하고 있다는 걸, 간호사들은 몰랐다. 책이 싫다는 게 아니다. 이곳이 싫은 거다. 이곳에서 책을 읽기 싫은 거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면 당신이 책을 읽을까.


당신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간호사의 질문에 답한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세요. 쓰세요. 지난번에 뵈니 따님이 아주 예뻐요.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이 더 예뻐요. 보기 드물게 사이좋은 부녀지간이에요. 부러워요. 좋으시겠어요.


당신이 껄껄 웃는다. 고맙습니다. 딸의 번호를 눌렀다. 이곳에선 휴대전화를 쓸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딸의 전화번호를 직접, 당신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야 한다. 오랫동안 딸은 당신에게 단축번호 0번이었다. 그마저도 딸이 입력해준 것이다. 0을 누르면 딸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수도 없이 0번을 눌렀던가. 그러나 이제는 0으로 시작하는 11개의 숫자를 모두 눌려야 한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도 딸에게 가 닿을 수 있다. 비록 이곳에 묶인 몸이기에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으로 시도할 수 있다.


오늘 오냐, 고 딸에게 물었다. 딸은 안 그래도 지금 이곳에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당신의 친구, 당신의 아내와 함께. 작은딸은 회사 일이 바빠 휴가를 낼 수 없다고 했다. 당신은 왜 친구와 함께 오냐고 물었다. 당신은 그 친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싫어했던 건 아니지만 이곳에 오고 나서 싫어졌다. 당신은 친구를 원망하고 또 미워하고 있었다. 당신을 병원에 보내는 게 좋겠다고 친구가 가족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었겠지만, 대체 그가 뭐라고 우리 가족 일에 관여한단 말인가. 당신은 친구도, 가족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은 당신이 있는 곳은 너무 외진 곳이라 터미널에서 매우 멀기 때문에 당신과 당신의 아내, 딸 자신까지 모두 버스를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려면 또 한참을 굽이굽이 돌아 나와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가 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마침 당신의 친구가 오로지 당신을 태워 가기 위해 월차를 냈다고 했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많이 걱정한다고도 했다. 거짓말. 당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오고 있다니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당신은 이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물밑작업을 해왔다. 당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고집이 센 사람이다. 아내와 딸이 면회를 왔을 때, 당신은 심지가 굳은 큰딸보다는 마음 약한 아내를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당신은 부드럽게 아내를 어르다가 무섭게 아내를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이곳에서 빼내달라는 당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아내는 이곳을 나오면 달라질 수 있냐고 물었다. 당신은 거짓말로라도 아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당신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다. 이곳에 1년을 있는다 해도 당신 자신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변하기에는, 달라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것이다.


아내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모든 것을 체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내는 놀란 토끼, 숨죽인 강아지 같았다. 그 뒤로 몇 번 당신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곳에서 전화는 금지돼 있지만 당신은 이곳의 신사였으므로 간호사를 설득해 몇 번의 통화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당신은 아내에게 돈을 준비하라고 했고 정확한 날짜를 이야기하며 그날 이곳을 방문하라고 했고 딸들을 설득하라고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마지막 말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했다. 간호사가 없을 때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당신은 언제나 그렇듯 당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것을 쟁취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한 시간 여 후면 당신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이미 간호사들을 제외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었음을, 오늘이 이곳을 떠나는 날임을 여러 번 말해두었다. 이곳을 떠나는 순간, 이곳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오늘로 당신이 이곳에 온 지 한 달 하고 보름이 지났다. 당신만큼이나 일찍이 이곳을 떠나는 이들은 좀처럼 없다. 대개 가족에게 버림받았거나 병원 측에서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 받기 위해 영세민들을 입원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거나 아예 이곳을 떠날 마음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종종 이곳을 떠나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당신도 보름 전 이곳을 떠난 박에게는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박에게 집 전화번호를 주며 아내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 사람의 지시가 없으면 전화카드를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당신은 간호사들에게 부탁해 가까스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원하는 만큼 전화를 쓸 수는 없었다. 물론 듣는 귀가 많아 원하는 말을 원하는 어조로 내뱉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당신은 박을 통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아내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박을 생각하면 이따금씩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이곳은 또 다른 감옥이며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는 것만이 당신에게 이로움을 알려준 이가 박이기 때문이다. 박은 이곳을 나가겠다고 여러 번 난동을 부렸고 그때마다 독방으로 끌려가 코끼리 주사를 맞았다. 집채만한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큼 강력한 주사라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그 주사를 코끼리 주사라고 불렀다. 그 주사를 맞으면 24시간 동안은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했고 2~3일은 멍한 채로 힘없이 지내야 했다. 당신은 그런 박을 몇 번이나 지켜봐야 했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이곳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때때로 간호사들은 딸이 당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럴 때면 당신은 순한 양처럼 그들에게 딸의 편지를 내밀었다. 박을 통해 당신은 이곳에서 저항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딸은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편지에 당신과의 통화 내용이나 퇴원에 관한 말을 언급하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따금 환자복을 빨면서, 변기에 앉아 괄약근에 힘을 주면서, 건강검진을 하면서, 사회복지사와 차를 마시는 순간에 딴 생각을 하면서, 알콜이 몸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영상을 관람하면서 멍한 상태로 이곳에서 깨어난 그 순간을 떠올렸고, 당신의 부모와 당신의 동생들과 당신의 아내와 당신의 두 딸들과 당신의 친구들과 당신의 직장 상사와 당신에게만 궂은일을 시키던 당신의 동료들과 이곳의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돈만 밝히는 의사와 가식의 가면을 쓴 간호사와 사람 좋은 척을 하는 사회복지사와 가난한 것만도 모자라 힘도 없고 자기 자신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환자들과, 그런 환자들을 여러 날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코끼리 주사와, 당신에게 무력증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의 약과, 바깥을 수없이 왔다갔다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위층 정신병동의 노인들을 미워했다. 그럴 때면 당신의 주먹은 꽉 쥐어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풀어졌다.


언젠가부터 당신은 꿈을 꾸었다. 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당신은 울부짖었다. 당신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점처럼 작은 벌레떼들이 당신에게로 모여들었다. 벌레를 피하기 위해 달리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당신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벌레들은 벌레가 아니라 벌레처럼 작은 사람들이었다. 당신이 그들을 자세히 보려고 잠깐 멈춰섰을 때 점처럼 작던 사람들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놀라 입을 벌렸고 그들은 어느새 당신만큼 커졌다. 그들은 당신에게 달려왔다. 다리를 저는 사람, 돈을 구걸하는 사람, 봇짐을 진 사람, 아기를 어르는 사람,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들이 저마다 당신에게로 달려와 도와달라고, 나를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들을 모두 도와줄 수 없음이 괴로워 울부짖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췄다. 당신이 죄송하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점점 커졌고 당신은 점처럼 작아졌다. 당신은 바들바들 떨며 더욱더 죄송하다고 말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와드리고 싶은데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당신은 어느새 처음의 그들처럼 작아져 있었고 해일처럼 거대해진 그들의 무리가 점처럼 작아진 당신을 덮쳤다. 당신은 그들이 괴물처럼 보였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 걸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아무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연신 죄송하다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꿈에서 깬 당신은 지쳐 있었고 그래서 노곤했으며 점으로 화한 당신의 존재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 고통에 가슴을 쳐야 했다. 당신은 연약했고 현실과 꿈의 경계는 불명확해서 하릴 없이 목구멍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당신은 부서지기 쉬웠으나 당신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뭔지 모를 것의 정체는 너무 무거웠고 그리하여 당신은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신은 가엾고 나약하고 철없고 어렸다. 당신의 긴긴 생애는 끝이 없는 터널과도 같았고 당신은 출구를 찾기보다는 끝없이 후진하는 쪽을 택했다. 당신은 캄캄하게 펼쳐져 있을 터널이 두려웠으나 아직 자신이 터널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끝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쳐봤자 후진하고 또 후진하는 차가 속력을 내는 건 어렵다.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당신의 온 생애가 소모됐고 당신의 삶의 깃발은 이미 회피로 펄럭인 뒤였다. 당신 생의 고독과 절망이 고단하게도 바람에 나부꼈다.


*

너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위는 온통 어둠뿐이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빛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밤의 고속버스, 그 안에 시루떡처럼 누워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혼곤한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너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고 막상 잠에 들라치면 어젯밤에 꾼 꿈이 생각나 다시 눈이 떠지곤 했다.


너는 아버지를 죽였다. 까만색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를 죽였다. 너는 차창을 두드려 아버지가 창을 열게 만들었다. 창이 스르륵 내려가자 너는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시퍼런 칼을 꺼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에 그 칼을 내리꽂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주욱 긁혀 피가 떨어지는 순간 너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너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꿈속의 어두운 색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네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너는 더욱더 꿈의 세계로, 그 어두운 색채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어느새 네 몸엔 온통 어둠이 묻어 어둠 범벅이 되었고 너는 뜬눈으로 또 새벽을 맞이해야 했다.


너는 이 차가 갑자기 다른 차와 부딪혀 산산조각나고 그래서 다가올 너의 죽음을 상상해보았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너는 한 번도 너의 존재 가치를 대단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너는 감히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감히 이곳에 던져졌기에 묵묵히 그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건 삶이 너에게 준 형벌이었고 너는 온몸으로 그 형벌을 짊어져야만 했다. 네가 결정할 수 없었던 그 일에 대해 너는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온전히 너의 몫이어야만 했다. 원망하면 할수록 더더욱 형벌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그래서 너는, 온전히 모든 잘못을 너에게 돌리는 쪽을 택했다. 네가 없으면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와 그나마 너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동생이 짊어질 형벌의 무게가 더욱 커질 것이다. 너는 이글거리는 고통을 차마 토해내지 못하고 품고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터널을 지나며 너는 숨을 참았다. 언젠가 어릴 적에 터널을 다 지날 때까지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눈을 감고 터널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염없이 소원을 되뇌었다.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날 것을, 끝나고야 말 것을 너는 믿었다.


터널을 지나고 눈을 뜨자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리는 게 보였다. 너는 떠오르는 지난 기억에 네 몸을 맡겼다. 공연장에서는 한창 악극이 진행중이었다. 너는 카운터에서 멍하니 통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빗방울이 낙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닿은 빗방울들은 잠시 위로 솟구쳐 오르는 듯했지만 이내 땅으로 떨어져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너는 고스란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두 너와 너의 가족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너는 천천히 낙하하는 수만 개의 빗방울들이 아스팔트를 적시던 그날 공연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명품가방을 둘러멘 손님들을 맞으며 그보다 두 세 단계 아래의 브랜드 가방을 둘러맨 동료들의 시기 어린 욕망을 벗어났다. 일당을 모아 다음 달엔 꼭 프라다를 사고 말겠다는 그녀들의 무리에서 떨어졌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듯하지만 사실은 한없는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알바생들을 부리고 그들을 비웃는 것에서 기쁨을 맛보는 매니저의 형편없는 감정기복으로부터 헤어났다. 너의 생각에 네 주위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낙하하고 또 낙하할 뿐, 그뿐이었다. 자칫 솟아오르는 것 같지만 다시금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을 치는 자의 기분은 바닥을 치는 이만이 알 수 있다. 그가 아니고선, 영영 알 수 없고 누구 하나 알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끝없는 밤의 바닥을 밟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너는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의 공기를 묻힌 채로 밤의 택시에 몸을 실었다. 기사가 너를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묵묵히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의 남루한 피곤을 감지한 듯 보였다. 너는 휴대전화를 들어 고향집의 번호를 눌렀다. 늙어가는 너의 어미가 새벽의 고단함과 너에 대한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너는 무사히 고향에 도착했으며 10여 분 후면 집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너의 어미는 무엇이 그리 좋고 기쁜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미는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을 지나 몸을 가누기가 힘들 터인데도 네 앞에선 그런 티를 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느낌이었다.


아아. 가련한 여인. 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밤의 택시에서 네가 잘 아는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투명하게 네 몸을 감쌌고, 너는 네 심장에 자리잡은 포도덩굴이 사납게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진심이 담겨서 나의 마음이 전해진다며 가끔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향의 밤은 어두웠고 고요했고 그리고 한없이 아팠다. 오래된 테이프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너는 기사에게 현금을 지불했고 잔돈은 거절했다. 안녕히 가라는 인사를 건네고 택시 문을 닫으며 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향의 밤하늘엔 놀랍게도 별이 떠 있었다. 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결국, 그는 떠나고 노래만 남았네. 정말이지 그는 떠났고 노래만 남았다.


407호 현관문을 열자 너의 어미가 기쁜 얼굴로 뛰어나왔다. 어미의 얼굴은 지지난 달 설에 봤을 때보다 더 부어 있었다. 오랜 우울증으로 인한 불면과 그로 인한 약물 중독으로 어미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너는 퉁퉁 부은 어미를 끌어안으며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너희 부모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니. 그냥 인연 끊고 살면 속 편하다. 그리고 나랑 살자. 우리 둘이 살자. 포도덩굴의 가시가 너의 심장을 찌르는 듯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너는 어미의 부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부었어. 병원에서 또 약을 바꾼 거야. 높낮이가 없는 네 물음이 어미에게 가 닿았으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미는 그저 네 손에 자신의 얼굴을 맡긴 채 해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미의 눈동자 속에 들이찬 네 얼굴을 보며 너는 그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너의 현실은 이곳이다. 너의 어미가 있는 바로 여기다. 너는 앞으로도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몸은 이곳과 멀어진다 하여도 허공중의 바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네 발을 이곳에 묶어둘 것이다. 그 뿌리는 너무도 단단해 네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너를 더욱 깊게 박아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 뿌리는 부정하면 안 되는 거이다, 고 말하던 네 할미의 북풍 같은 가르침에 네 귀를 맴돌았다.


왔어? 방문을 열고 간신히 얼굴을 내민 네 여동생의 담비 같은 눈동자가 네 기척을 좇는 듯했다. 행여나 네 뿌리가 흔들릴까 저어함을 담은 서어함으로. 너는 네 몸의 어떤 한 부분이 소진되어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기진한 채 잠 속으로 기어든 너에게로 예사 그 꿈이 찾아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잠든 네 머리맡을 파고들던 바로 그 꿈이었다.


너는 아주 깊은 숲 한가운데에 있다. 일견 울창한 초록의 숲이 보이는 듯싶더니 장면은 빠르게 줌인돼 온통 하얀 벚꽃 나무들 아래 네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 그곳의 벚꽃잎들은 놀랄 만치 투명했다. 흰 빛에 맑음이 어려 시나브로 춤을 추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그러한 풍경을 즐길 수가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발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저 계속 제자리를 맴돌 뿐.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이 타들어갔다. 너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발밑을 내려다본다. 발목 부분에 스트랩이 달린 와인색 구두가 마치 네 몸을 들어 올리듯 너를 돌리는 것 같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칼이 어깨에 닿으며 찰랑거린다. 너는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신한다. 구두가 너를 돌리는 건 아니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너를 조종하고 있는 거다.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럽다. 멀미가 나 토할 것만 같고 다리에도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곳은 뱅글뱅글의 세계. 너도 뱅글뱅글 떨어지는 벚꽃잎도 뱅글뱅글 머리칼도 뱅글뱅글 화이트와 민트 컬러로 구성된 네가 입은 체크 원피스도 뱅글뱅글 원피스에 받쳐 입은 화이트 롱 블라우스의 둥근 카라가 뱅글뱅글.


맑은 하늘이 차차 어두워진다. 네 꿈속 카메라는 이내 지척에 있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 너의 심장에도 두려움이 번진다. 남자는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있을 뿐 얼굴 전체에 복면을 두르고 있다. 온몸에 까만 천을 두른 남자.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피부 세포 단 하나라도 훔쳐볼 수가 없다. 오직 드러나 있는 그의 눈만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길게 찢어진 그의 눈매가 너는 싫다. 그 눈에서 번뜩이고 있는 그 무엇이 너를 소름 끼치게 한다. 너는 더욱더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다 네 앞에 가져다준대도 너는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다. 너의 두 발이, 너의 두 손이 달달 떨려온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 너는 춤추는 것 그 자체에 푹 빠져 주위의 어떤 것도 돌아보지 못하는 도취의 상태에 빠진 것만 같다. 아주 귀엽고 아주 사랑스러운 너의 그 몸짓이 바람에 날리어 가볍게 움직이며 주위에 찬란함을 흩뿌려놓는다. 팔랑거리며 나리는 흰 벚꽃잎 역시 잠시도 쉬지 않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일전에 너는 이 꿈 이야기를 동생에게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채 입학하기도 전부터 반복적으로 꿔오던 꿈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겁이 나 네 안에만 꼭꼭 감춰오던 꿈 이야기를 동생에게 했던 건 왜일까. 어느 눈 내리던 밤, 창문으로 차가운 눈 구경을 하면서 너는 너도 모르게 그 꿈 얘기를 동생에게 흘렸던 것 같다. 내리는 눈송이가 꿈속의 투명하고도 흰 그 벚꽃비와 닮아서였을까. 꿈은 소리 없이 너에게서 새어 동생의 고막으로 흘러들어갔고, 동생은 내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신기한 꿈이네,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랬던 동생이 자주 다니던 미용실 원장에게 추천받아 들른 점집에서 네 꿈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을 때, 너는 적잖이 놀랐다. 그 점쟁이 말이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꿈에 투영됐다고 하더라? 대체 그 꿈 어디에 그런 게 배어 있다는 거야. 너는 동생에게 되물었다. 끊임없이 돌고 있는 네 모습에. 그리고 그런 너를 지켜보고 있는 그 남자의 눈빛에. 너는 어리둥절했다. 이 꿈이 그렇게 해석되나. 뭐야, 그 점쟁이. 못 믿겠어. 나는 그 점쟁이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너를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는 동생이 말을 이었고 너는 콧방귀를 뀌었다. 웃겨. 나는 그런 거 없다니까. 글쎄, 모르겠어. 점쟁이의 말을 듣는 순간엔 아아, 그렇구나. 너란 사람, 그랬어. 그런 사람이었어. 좀 가엾다. 뭐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다고 내가 네게 뭘 해주겠다거나 또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그러면서 동생은 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너는 동생의 언니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존재였다. 너는 그러한 관계가 좋았다. 모두에게 친구이고 싶었다. 네 부모에게도. 그래, 그날 밤은 모처럼 곤한 잠을 잤던가. 아무 꿈도 찾아오지 않았던가. 아침을 맞기가 외줄을 타는 것처럼 공구하지 않았던가.


너는 지난 매일을 고단한 척추를 느끼며 시작했다. 너의 척추는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달랐는데, 가끔은 너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네 척추뼈로 기타를 연주하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일곱 번의 수술에도 너의 척추는 다른 이들의 척추와 같아질 수 없었고, 마지막 수술 후 입가를 실룩이는 의사의 미소에서 너는 평생을 척추가 주는 고통에 잠겨 그것이 고통인 줄도 모르며 지내야 함을 예감했다. 그리고 네 예감대로 고통은 곧 네 것이 되었다. 고통 속에서 너는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와도 같았다.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시나브로 넘어가면서 고통 속을 유영하게 되었고, 이내 샴쌍둥이처럼 고통과 딱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였던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면서 그것은 오히려 분리가 더 어렵게 변해버렸다. 언젠가 네가 사윌 때 고통 또한 너와 함께 사위어가고 그렇게 너와 함께 묻힐 것을, 너는 알았다.


미역이 위에 붙듯 고통이 네게 달라붙을 때마다 어미는 너를 쓰다듬고 깊은 밤이 더욱 캄캄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너는 참으로 별난 아이였지. 낮에는 이 세상에 없다는 듯 잠들고 밤에는 제발 이 세상에서 날 좀 꺼내달라는 듯 울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딱 네 아빠를 닮았던 건데 그땐 아무도 그걸 몰랐다. 네 아비가 널 늘 짓밟으려 들었지. 탄광에서 온몸에 석탄을 묻히고 와 씻지도 않고 잠들기 전에, 섯다 할 돈이 부족하다고 옷장 깊숙이 숨겨둔 월급봉투를 눈이 벌개져가며 찾기 전에, 찬가짓수가 왜 이리 적냐며 나를 흠씬 두들겨 패기 전에. 빽빽 울고 있는 네 작은 몸을 마구 짓밟을 때 내가 달려가 널 감싸안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나도 짓밟혔다. 네 울음소리 속에 혼곤한 내 신음소리가 합쳐지고 나서야 분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 굽어 있는 네 척추를 보면, 짓밟히고 또 짓밟히던 그 밤 생각이 나.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자꾸 떠올라. 이상하지. 그런 기억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지워지지가 않아. 그저 계속 선명해질 뿐 휘발되지 않아. 그러면서 어미는 자동차 보닛맛이 나는 위장약과, 환자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의사가 처방한 파란 수면제를 차례로 털어 넣었다.


매일 어제보다 더 부서지고 있는 어미를 지척에서 지켜보면서도 너는 아비를 온전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네 척추에 매스가 일곱 번 가 닿을 때 칠천 병의 알콜이 네 아비의 혈관을 타고 흘렀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 아비의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인생의 삼분의 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알았다는 게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아비의 무름과 약함을 깨닫기에 너는 너무 바빴다. 좁은 아비의 방 밖에서 너는 늘 아비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종종거렸다. 그러나 숨죽은 파김치같은 음성으로 열 시간, 열한 시간 계속되는 아비의 혼잣말이, 고래고래 네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아비의 핏발 선 음성이, 네 앞에서 식칼을 들고 휘두르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아비의 실상 없는 말이 잊고 있던 다른 일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자는 척을 하고 살아 있는 척하면서 죽어 있는 날들 속에서 너는 뛰다가 걷고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끝이 없는 굴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갈 때에 너는 어린 날의 네 모습을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귀를 막고 끙끙대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와장창,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을 때 발등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채로 어미를 노려보던 네 아비의 붉은 눈, 부러진 코를 감싸며 쓰러지면서 도망가, 라고 외치던 어미의 까만 동공, 그저 동생의 손을 잡고 현관을 넘어 달리던 그 어느 날. 유난히도 네가 무서워하던 주인집 할머니의 불독이 네 앞길을 막아섰을 땐 차라리 어둠의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고 싶던, 하릴없이 동생의 손만 꽉 그러쥐었던 네 모습. 수학은 깨끗이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세상이란 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세상이란 곳은 수학보다도 더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과 기어코, 마주해야 했다.


*

숨 참고 소원도 빌었니. 동생의 음성에 너는 눈을 떴다. 터널을 지나는 내내 눈을 감고 숨을 참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터널은 길었다. 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너는 그 미신을 믿지도 않았었다. 단지 매달려 있었을 뿐. 붙잡고 있었을 뿐.


여기까지 오는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만으로도 버거운데 네 사람의 생이 휘청였다. 각자의 생과 생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서로 용서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가 정답이 될 수도 없을 텐데. 손을 잡는다면, 그 생은 조금이라도 단단해질 수 있을까. 한 달 보름 동안의 입원비를 수납하면서도 네 머릿속은 심하게 팔딱거렸다. 고통이 너와 하나가 되었듯이 이 거슬리는 두근거림도 네 안에 녹아내려 합쳐질 수 있을까.


담배 연기가 허공중에 흩어진다. 아비가 태우는 라일락이다. 아비의 흔적은 매점에도 남아 있어서 한 달 보름 동안 십만 원 어치가 넘는 라일락을 태웠다. 때때로 캐러멜맛이 혀끝을 감도는 스카치캔디도 사 드셨다, 는 매점 아주머니의 말이 그나마 네게 위안이 되었다.


너는 아비처럼 도넛 모양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담배는 아비에게 배웠다. 어미가 외출한 새 노란 겨드랑이털을 지닌 여자가 나오는 외국영화를 보면서 일곱 살의 너는 아비에게 담배를 배웠다. 켁켁거리는 네 등을 몇 번 토닥이며 아비는 도넛을 세 번이나 만들어주었다. 어린 너는 깔깔거리며 한 번 더, 한 번 더를 외쳤다. 그 도넛 때문에 너는 네 마음에 진짜 도넛이 생겼어도 이 또한 흩어지는 연기가 될 거라 웃어넘길 수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도넛처럼 뻥 뚫린 구멍이 연기처럼 사라질 때 비로소 너는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담배도, 두근거림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너를 옭죄어오는 사슬까지도.


정문으로 아비가 걸어나온다. 어미와 동생이 저만치서 아비를 기다리고 있다. 너는 몰래 담배를 비벼 끈다. 햇살 속에 휘청이는 아비의 모습이 눈부시다. 너는 따가운 햇볕 속에 쪼그라드는 눈을 애써 치켜뜨고 천천히 아비에게로 걸어간다. 돌아가는 길에 맞닥뜨리게 되는 터널에서 너는 절대 눈을 감지 않으리라. 숨을 참지 않으리라. 소원도 빌지 않으리라. 그저, 눈을 부릅뜨고 아비의 손을 잡으리라. 저들과 함께 딱 한 번만 터널의 빛을 볼 수 있다면….


너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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